[R]J. S.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 오펠리 가이야르 :: 2007. 3. 4. 16:03

 


 

J. S.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통념은 무섭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한 번 '그렇다'고 인식이 되면 그 뒤로 어떻게 되든지 그 인식이 바뀌기는 어렵기 때문이지요. 특히나 그 통념이 성별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지탄을 받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통념은 마치 바퀴벌레와도 같아서, 어느 분야에서든, 그리고 누구에게든 어느 정도의 통념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역시 바퀴벌레처럼, 박멸하려 해도 잘 없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사람들을 괴롭히지요.

 

제게 있어 좀 벗어나야겠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하긴 꽤 그렇긴 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통념이 있으니, 다름 아닌 성별에 대한 통념입니다. 단순히 성별에 대한 건 아니고, 성별과 악기에 대한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피아노는 역시 남자 악기야'라는 생각이 대표적인데, 쿵쾅거리는 강렬한 음악을 많이 듣다보면 안 그러려 해도 아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첼로도 역시 남자한테 잘 어울려'라는 생각인데, 첼로의 울림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딱히 틀린 생각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법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고(?),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며, 통념 역시 박살나라고 있는 것인 듯합니다. 엘렌 그뤼모와, 최근 접한 세타 타니엘의 음반 이후로 '피아노는 남자 악기!'라는 -마초 소리를 들을 만한- 생각은 어느 정도 묽어졌습니다. 자클린 뒤 프레를 들은 이후로는 '첼로도 남자 악기!'라는 -역시 마초 소리를 들어 마땅할- 생각 역시 많이 엷어졌지요. 그리고 요즘,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생겨서, 저는 즐겁게 저의 통념을 박살내고 있는 중입니다.

 

오펠리 가이야르의 소리는 중후합니다. 아주 묵직한 것이 마치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것 같지요. 바흐를 연주함에 있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원하는 덕목이 중후함이고, 다들 가뿐한 바흐보다는 묵직한 바흐를 원하다 보니-그래서 전혀 새로웠던 비스펠베이의 두 번째 녹음은 순간적인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가이야르의 중후한 음색은 우선 좋은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또, 단순히 중후하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그간 들어 본 바흐 연주자들은 대부분 중후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었지만, 가이야르는 그들과는 약간 다르거든요.

 

카잘스, 로스트로포비치, 푸르니에, 샤프란 등등...사실 중후한 소리를 내주는 연주자들은 저들 이외에도 꽤 많습니다. 굳이 유명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좋은 바흐 연주를 들려주는 사람들도 꽤 되고요. 그런데 가이야르는 저들과는 분명히 다른 소리를 냅니다. 중후하고 묵직하긴 한데, 어딘가 다른 소리 말이지요.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잘 맞아 떨어지려나, 고민을 하다가, 음반을 샀던 쇼핑몰의 자체 리뷰에서 더없이 적확한 표현을 찾아냈습니다.

 

가이야르의 소리는 풍만합니다. 네, 그냥 '중후하다'고 하는 것과는 좀 다르지요. 나중에 좀 더 좋은 표현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소리는 분명 풍만한 소리입니다. 소리가 풍만하다, 좀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잠깐 눈을 감고 연주를 들어보세요. 이건 단순히 아래쪽에 무게감이 실려있는 중후함과는 다릅니다. 전체적으로 무게가 고르게 분산되어 있고, 어느 쪽으로나 균형이 잘 맞춰져 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연주는 부드럽습니다. 마치 갓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처럼요.

 

대개는 -빌스마나 비스펠베이의 연주처럼- 거칠고, 또 약간은 답답한 소리를 내는 바로크 첼로로 이렇게 부드럽고 안정적이면서도 풍만한 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소리가 날 수 있는 것은 가이야르의 주법 때문인데, 연주를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그의 연주에는 여느 연주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끽끽'하는 소리가 없습니다. 현과 활이 서로 긁히면서 날 수밖에 없는 이 마찰음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없앰으로써, 훨씬 더 부드럽고 풍만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크 첼로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 '바로크 첼로'라는 것인데, 악기 자체의 특성 때문에 음폭이 대단히 좁고, 활달하게 -혹은 원활하게- 연주하는 것이 어렵지요. 그래서 바로크 첼로는 '악기와의 대화'에는 더없이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활동 영역은 그 음폭만큼이나 축소되어 있고, 당연히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게 사랑받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물론 최근엔 처우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요-. 하지만 가이야르는 이 역시도 -어떻게 했는지는 또 모르겠지만- 해결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의 음폭은 꽤 넓은 편이고, 연주 자체가 상당히 활발한 편이지요. 그래서 그의 연주는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습니다. 현대 첼로와는 대척점에 있는 악기로 중간점을 찾았다고나 할까요.

 

재미있는 것은, 가이야르가 비스펠베이와 마찬가지로 거트 현-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현-을 사용하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음색을 낸다는 점입니다. 거트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연주이지요. 바로크 첼로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바로크 첼로 특유의 음색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인지라, 가이야르의 존재가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어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이야르는 분명 바로크 첼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굳이 전통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연주에 환호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비발디 소나타 녹음도 대단히 기대되는군요.

 

결과적으로, 앙브루아지 레이블의 얼굴로 오펠리 가이야르를 선택한 바르톨로메의 결단은 우리에게는 큰 선물인 셈이고, 바르톨로메 그 자신에게는 회사 경영에 큰 이득이 되었습니다. 아직 젊은 축인 가이야르의 행보도 행보이지만, 조르디 사발이나 파비오 비온디 같은 원전 연주자들과 함께 작업해 온 바르톨로메의 새로운 레이블 '앙브루아지'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가이야르들을 키워낼 지도 상당 기간 동안 꽤 큰 관심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창 밖에 봄비가 속살거리는 일요일, 가이야르의 연주로 한 주를 마무리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