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심준호 첼로리사이틀 '첼로의 향기' :: 2013. 8. 24. 19:39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 민태원, <청춘예찬> 中

 

 

어느 평론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절제'라는 말은 사실, 그저 청중에게 전달하지 못할 죽어버린 감정을 윤색하기 위한 장치, 단어 하나로 모든 어색함을 해소해버릴 수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와 다름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즐겨야 할 대상보다는 인생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부모들과 교사들의 어긋난 마음가짐은, 연주자를 그저 실수를 줄여 정확한 음색만을 내는 '연주술'에 매진하게 만들고, 그런 음악을 어색하게나마 포장해주는 단어로 '절제'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연주자에게 감정이 바탕되지 않는 절제는 사실, 기계적 매너리즘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물론 랑랑처럼 울어제끼면 그것도 곤란하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깊고 넓은 음색을 지녔음에도 여러 차례의 연주에서 상당히 절제된 모습을 보여왔던 심준호의 독주회는 꽤 큰 의미를 지녔습니다. 국제 대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며 20대 초중반을 보내고 이제 서른이 아스라이 보이는 그의 나이는, 단순히 기술이 뛰어나거나 거장들과 닮은 소리를 내는 연주자를 넘어 자신의 소리를 낼 때가 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물론 이미 상당히 성숙한 음악을 보여주긴 했지만, 거장들의 카피캣이냐, 아니면 심준호 자신만의 소리를 낼 수 있느냐의 질문을 머릿속에 담고, 또 기대를 품고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첫 곡인 베토벤 소나타 2번은 첫 음에서부터 예전과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왔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답답한 소리가 났던 이전과 달리 아주 트인 소리가 나고, 연주 초반 음색을 확실히 잡지 못하던 고질적인 문제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서주부에서 긴장과 이완의 폭을 크게 가져가며 이후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바닥을 넓게 다져놓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덕에 아주 컸던 주제부의 변동폭에도 곡의 흐름 자체는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지요. 기뻐야 할 부분은 기쁘게, 어두워야 할 부분은 어둡게, 굳이 감정을 틀어막지 않으니 보잉도 자연스러웠고, 반주자와의 호흡이 아슬아슬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박남수의 '새'처럼 말입니다.

 

편하고 경쾌하게 시작된 2악장에서는 무대 위에서 '연주한다'는 기쁨이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기계적인 포르테, 그냥 소극적인 피아노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악상이 춤추고 있었습니다. 곡을 해석한다는 명제, 악상과 음표에 담긴 역사에 짓눌리지 않고, 드디어 껍질을 깨고 나와 자신만의 베토벤을 내보이는 수준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약간의 음정 실수가 있었지만 이미 그 정도를 신경써야 할 수준은 지나버린지 오래였습니다. 마치 길렐스나 푸르니에를 들을 때처럼 말이죠.

 

한국에서 초연된 류재준의 소나타는 얼후 소리 같은 고음에서의 동기로 시작됐습니다. 무언가 모호한 대상을 묘사하는 듯한 주제부가 인상적이었고, 목가적이고 노을 같은 비감이 묻어나는 2악장 역시 무리한 전개 없이 아름답고 편안했습니다. 첫 부분을 듣자마자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이 생각난 3악장은 톰 소여 일행이 잭슨 섬에서 만난 천둥번개와 빗방울처럼 짧고 강렬했습니다. 독주자와 피아노 모두에게 상당한 중노동을 강요했음에도, 곡은 복잡하지 않게 소담스럽고 사랑스러웠으며, 아주 소소한 주제들은 마치 일상처럼 다채로웠습니다.

 

베토벤과 함께 큰 기대를 모은 프로그램은 역시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였습니다. 2010년 이후 여러 차례 들어왔던 심준호의 3악장 연주는 늘 '어떻게 저 나이에 저렇게 슈타커처럼 연주할 수 있는지' 놀라움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래서 드디어 전곡을 듣게 되는 이날이 제게는 참으로 기다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빈틈없이, 그러나 단단하지 않고 유연하게 시작된 코다이의 무반주 소나타 1악장은 슈타커와 같이 자유로운 전개였지만 분명 다른 모습이었고, 이미 전위적인 모습이었던 슈타커에게서 벗어난 한 발짝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특히나 코다이를 기계적인 난곡으로 대하기 보다 음악으로 대하려는 노력이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물론 아직은 좀 더 자기 것으로 다듬어야겠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전대의 거장들에게서 벗어나 자기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사진 : 이세호>

 

'원래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개방된 소리, 대단히 유연하고 활발하지만 절대 과하지 않은 소리와 함께 한 2악장은 마치 꿀단지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꿀이 담겨 있어서 꿀을 다 먹고 나서도 단맛이 남아 있는, 여운이 길게 남는 그런 맛이었죠. 잘 배운 학생 같았던, 작은 슈타커의 느낌이었던 예전과 달리, 자기만의 코다이를 들고 나와 자신감 있게 연주한 3악장 역시 대단히 놀라웠습니다. 특히 아주 밀도 높은 소리를 내며 불붙은 듯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고,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이 더욱 더 기대되는 연주였습니다.

 

이번 연주의 느낌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개방'입니다. 그간의 절제에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연주를 들고 나와 드디어 청중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으니까요. 이 날 연주를 듣고 저는 이전의 감탄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저 곡을 저렇게 자기 곡처럼 연주해낼 수 있지?'라는 놀라움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분명 무대 위의 심준호에게서는 청춘의, 봄과 같은 동력이 느껴졌으니까요. 이제 그는 단순히 연주 잘 하는 연주자, 늘 절제하는 모습만을 보이는 연주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청중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아가고 있었습니다.

 

10대의 치기를 꾹 누르고, 20대의 혈기를 식히며 늘 묵직한 연주를 들려주었던 심준호. 그가 들려준 자유롭고 열려 있는 음악은 이제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변화, 그리고 '심준호의 해석'이라 이름붙게 될 큰 흐름의 첫머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우친 그가 앞으로 열어갈 음악이 더욱 더 기대되는 이유는, 깨달음에 대한 숭산 큰스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하늘이 파랗고 나무들이 푸르더니, 깨닫고 나니 하늘이 파랗고 나무들이 푸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