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피에르-로랑 에마르 피아노 리사이틀 :: 2012. 11. 27. 23:46

 

 

 

 

'모든 시대는 이전 시대를 꿈꾼다.' 현대 클래식 음악계처럼, 쥘 미슐레(Jules Michelet)의 명제가 잘 들어맞는 시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적게는 백 년에서 많게는 삼백 년, 심지어 그 이전 시기의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까지 발굴되어 연주되고 있는 이 시대에, 동시대의 작곡가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략 19세기 전반(全般)을 주름잡았던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이전 시대의 사조인 고전주의를 기피하고 그 이전 시대인 바로크,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르네상스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의 음악을 향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어찌보면 거의 한 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현대음악의 상황은 이전 시대의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당대의 현대음악'이었던 낭만주의 음악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듣고 사랑했던 음악인데 반해, 20세기와 21세기의 현대음악은 그조차도 버거운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음악을 들으러 대중가수들의 콘서트장에 가거나 TV를 켜지, 존 케이지나 슈톡하우젠을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거나 CD를 구입하지는 않습니다. 닭과 달걀의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러다보니 연주회 자체도 열리지 않고 CD도 많지 않죠. 음악사에서 현대음악 지니는 의의를 제외한다면 누가 윤이상을 듣고 쇤베르크를 즐겨 듣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현대 피아노 음악의 교과서'라는 피에르-로랑 에마르의 연주회를 앞두고 상당히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명암대비가 뚜렷한 포스터에 하인츠 홀리거, 슈만, 드뷔시, 리게티에 이르는 레퍼토리까지, 처음 들어보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있다는-  이 사람의 음악은 대체 어떤 것일까? 연주회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에마르가 연주한 리게티의 'Musica Ricercata' 음원이 있었고, 11곡을 모두 들어본 저는 홀린 듯 표를 예매했습니다. 

 

 

2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던 스티븐 허프와 왠지 비슷한, 중국식 의복을 연상케하는 연주복 차림으로 등장한 에마르는 처음부터 짧지만 강렬한, 하인츠 홀리거의 '엘리스'를 연주했습니다. (저 하인츠 홀리거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오보이스트가 맞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사망한 오스트리아의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세 개의 짧은 녹턴에서는 잠깐 사이에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는 압축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특히 정직하지만 그 자체로 별다른 꾸밈없이도 음향적인 효과를 내는 섬세한 터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끝난 것인지도 알 수 없어서 박수조차 치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객석 사이로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초절한 기교 자체도 어려운 곡이지만, 그와 동시에 주제와 함께 계속 변주되는 멜로디에 절대음악으로서의 시적 영감을 실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대곡이지요. 음반에서나 앞선 홀리거의 '엘리스'에서나 에마르의 고음은 유달리 맑고 깨끗한 음색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특징이 연주회장에서 슈만 특유의, 그리고 교향악적 성격을 지니는 곡의 드라마를 고조시켰습니다. 첫 소절부터, 첫 음부터 이처럼 슈만의 곡에 흐르는 비극적인 성향을 구현해 내는 연주는 처음이었습니다.

 

비록 몇 차례의 미스터치가 있긴 했지만, 에마르의 연주는 정확한 표현을 기반으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한 감정을 타고 전개되었습니다. 대단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 도회적인 느낌의 슈만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터치와 급박한 악상의 전개에도 충분한 효과와 자연스러운 전개를 모두 이루어내는 모습은 그런 느낌조차도 잊어버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논리적 개연성도 명쾌하고, 모자른 부분 없이 깔끔하고 명민했으며, 어느 모로 보아도 빈틈 없이 충실한 연주였습니다. 특히나 화성과 멜로디가 적절하게 쌓일 수 있도록 정확하게 유지되는 저음 타건과 페달링은 교향악적 악기로서의 피아노의 특성을 완벽하게 살려주었습니다. 이 곡을 들으며 눈물이 찔끔 나오기는 처음이었습니다.

 

 

2부의 첫머리였던 드뷔시 전주곡 역시 곡의 특색이 잘 살아 있었습니다. 마치 잔물결에 반사되는 빛과 같은 드뷔시 특유의 악상에, 어둠 속에서 장작을 던졌을 때 달리는 불티처럼 뜨겁고 영롱하고 내밀하지만 동시에 차갑고 치밀하며 자유로운 연주였지요. 슈만을 연주하며 화성의 토대를 구축하던 단단한 왼손은 이번에는 자유롭게 뛰놀며 물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슈만은 슈만의, 드뷔시는 드뷔시의 느낌이 완전히 살아있는 좋은 연주였습니다.

 

에마르가 펼쳐보인 세계의 마지막은 리게티의 연습곡이었습니다. 연주회에 갈 때는 늘 그 감상을 기억하기 위해 노트와 만년필을 준비해 가고, 이번에도 앞에서는 순간순간의 느낌들을 적어놓았지만, 리게티를 들으면서는 그냥 펜을 놓았습니다. 어떤 감상을 무리해서 적기보다는, 에마르의 연주를 따라 그냥 즐겨 보기로 한 거죠. 어차피 리게티의 음악 어법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우니까요.

 

결과적으로, 덕분에 마지막 곡은 이 마법같은 세계에서 좀 더 자유롭게 떠다니며 갖은 이미지들을 몽상하며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습곡의 마지막 저음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환상적인 세계에서 깨어나게 하는 종소리처럼 커다랗게 울렸을 때, 그리고 그 음이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숨죽이고 있던 객석 위를 날아다닐 때, 마치 시간을 다스리는 마법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길게 남아 있었을 때, 저는 이 사람의 충실한 팬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도 현대음악은 저를 포함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난한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정적인 작곡가들이 계속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같은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꾸준히 탐구하고, 우리가 좀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음악을 받아들인다면, 언젠가는 우리 시대에 다음 세대의 베토벤이 나타나 새로운 물줄기를 터놓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에마르와 같은 철학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