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2011 금호아트홀 라이징 스타 시리즈 - 첼리스트 심준호 리사이틀 :: 2011. 2. 27. 22:54


'예술(혹은 인생)을 완성한다'는 말에는 분명 커다란 어폐가 있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예술(인생)을 하나씩 쌓아올려 완성으로 다가간다는 점에는 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끝내 완성에 이를 수는 없겠지만, '완전'할 수는 있겠지요-. 철없던 어린시절을 지나 인생의 중반기에 막 접어들기 시작한 요즈음,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는, 아주 당연하고도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술의 경지는 나이나 경력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점과, 마치 음악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 정말로 있다는 것입니다.

2월 17일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첼리스트 심준호의 리사이틀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자리와도 같았습니다. 이 날의 연주는 아직까지 성장하고 있는 매우 젊은 연주자인 심준호에게는 리사이틀 데뷔 무대와도 같았으나, 평일 연주회임에도 이미 남은 자리가 거의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관객들이 모였습니다. 그만큼 심준호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벌써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연주자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 날의 프로그램은 베토벤 소나타 3번, 그리그 소나타,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였습니다. 사실 언뜻 보기엔, 곡의 난이도를 떠나서 성격만 생각한다면, 상당히 타당해 보이는 구성입니다. 세 곡 모두 뜨겁게 몰아치는 해석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편리한 흐름을 가져갈 수 있는 곡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심준호는 베토벤에서 아주 차분하고, 더 나아가서는 허허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아늑한 해석을 택했습니다.

생각했던 바와는 달라서였을까요, 처음엔 첼로가 너무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피아노 반주를 맡은 이윤수의 소리는 뚜껑을 다 열지 않았음에도 굉장히 큰 데다 표현과 터치 자체가 가감없이 아주 강렬하고 솔직했기 때문에, 피아노가 곡을 이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두 악기의 관계가 역전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만 2악장과 3악장에서는 곡이 지닌 긴장감의 차이 때문인지 첼로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며 피아노와의 간격을 잘 조율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허허롭던 베토벤의 해석이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된 평온함이라는 점은 바로 뒤에 이어진 그리그를 들으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1악장부터 심준호는 쏟아내는 듯한 보잉으로 격정적이고 불안한 분위기를 아주 잘 살려냈습니다. 지나치게 크지 않았나 싶던 피아노 소리가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되며, 곡이 지닌 극적인 긴장과 대립을 잘 살려내는 데 일조한 것은 물론입니다. 바로 앞의 베토벤과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하긴, 샤프란과 푸르니에를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읽었을 때 예상했어야 했을 텐데, 그의 베토벤이 소극적이라는 생각은, 그저 곡 구성을 보고 멋대로 짐작하고, 또 비스펠베이의 독주회가 남긴 인상이 아직 남아있는 저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그를 들으면서 베토벤을 되새김질하는 묘한 경험 속에서 다시 내린 결론은 '이 사람에게서 길렐스나 푸르니에가 느껴진다'였습니다. 어쩐지 먼 데서 들려오는 전대의 거장들의 연주가 스쳐지나간 듯한 느낌, 그런 잠깐의 그림자.

그리그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무대 위의 열정과 호흡까지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어, 객석과의 그 짧은 거리마저도 없애는 듯한 직관성이 돋보였습니다. 더구나 곡에 흘러 넘치는 악상들과 상념 속에서도 오히려 유머가 느껴질 정도로 즐거움이, 비스펠베이가 자주 보여주는 해학이나 익살과는 또다른 즐거움, 마치 나이든 연주자가 툭 하고 던지는 듯한 농담의 짙은 농담이 확 와닿았습니다. 이전까지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곡인데, 완전히 새로운 곡을 듣는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심준호는 베토벤과 그리그에서,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전혀 다른 배경이지만 왠지 '부엔디아'가 떠오르는- 어디에서고 느껴지는 그만의 그 우울한 서정까지...젊은, 아직 성장하는 연주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더군요. 그 나이 때 보통의 젊은 연주자들이 빠지기 쉬운 테크니션이나 스페셜리스트의 함정에 빠지는 모습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아주 편하게 연주하면서도 관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일전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가 연주하는 코다이를 들을 때도 놀랐었지만, 정말 우리 나이 스물 다섯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성숙하고 수준높은 연주, 이미 상당 부분 완성된 연주를 들려주는 첼리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 이윤수의 반주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은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상당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더군요. 자신의 독주회가 아님에도, 태양을 등지고 선 실루엣처럼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원래 그렇다'는 듯 여유 있고 자연스러운 모습은 심준호의 그것과 형제처럼 닮아 있었습니다. 다만 베토벤과 그리그, 라흐마니노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일관된 해석을 보여준 점이 약간 밋밋하다는 느낌도 들었으나, 이것이 되려 곡마다 변화하는 심준호의 해석을 탄탄하게 받쳐준 효과를 내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첼리스트 심준호의 이름 앞뒤에는 여러 가지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의 스승의 명성이나, 그가 우승한 콩쿨의 명성과 성적이나, 그에게 남겨진 유명한 첼리스트의 평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빈틈없이 장식하고 있지요. 그러나 무대에 선 그에게서 가장 빛나 보였던 것은, 길다랗게 늘어뜨린 미사여구와 빛나는 경력들보다, 마치 첼로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끊임없이 노력하며, 언제나 음악을 탐구하고 갈구하는 연주자, 이미 좋은 연주자임에도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첼리스트, '심준호'의 이름 세 글자였습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연주하는 진정한 음악가"
 - 나탈리아 구트만(Natalia Gutman, 첼리스트, 2010년 제 40회 베오그라드 죄네스 뮈지칼 콩쿠르 심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