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브람스 교향곡 2번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 2012. 2. 14. 23:51


 

 

 

 

'아름답다'는 말은 늘 '화려하다'는 말과 섞여 같은 뜻으로 잘못 쓰이곤 합니다. 수수한 아름다움을 두고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지요-'단아하다'거나 '우아하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TV는 갈 수록 우리 눈이 자연에서 느끼는 것보다 선명한 화질로 '이것이 진짜 자연의 색'이라며 우기고, 도시는 자꾸만 눈부신 조명으로 밤하늘을 가득 채워 갑니다. 화려함에 중독된 우리는 그래서, 활짝 핀 꽃에 쉽게 매혹되고, 만개의 그 순간에서만 아름다움을 찾곤 합니다.

 

하지만 예쁜 장미를 피워내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뿌리와 가시로 뒤덮인 줄기와 그냥 본다면 뭔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꽃받침입니다. 이들이 꽃봉오리를 만들어내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화려한 장미가 피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장미는 뿌리와 줄기와 꽃받침과 꽃봉오리도 아름답습니다. 이미 그 안에 장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향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어쩌면 뿌리로 부터 싹을 틔워 줄기를 만들고 꽃받침을 만들어 꽃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우는, 지난하기 짝이 없는 작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처음부터 끝까지 긴장할 수 있는 이야기는 더 이상 긴장할 일이 없겠지요-. 들으면 그대로 새가 지저귀고 호수가 하늘을 담고 산이 뒤를 선 정경이 보이는 듯한 브람스의 교향곡은 더욱 더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는 이것을 아마도 가장 잘 이해한 지휘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의 전개는 평범하고, 어찌보면 느릿느릿한 박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간혹 가다 슈만의 교향곡에서 보였던 푸르트벵글러의 번득이는 리딩이 보이기도 하지만, 연주 전반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따스한 분위기가 평화롭고 만족스럽던 브람스의 나날들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웅장한 부분도 결코 과하지 않고, 비극적 선율이 흐르는 총주에서도 결코 흐트러지거나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세 악장들은 그저 견실하고 탄탄한 연주 정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로도 매우 아름답고 낭만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옛 아날로그 녹음에 대한 추억 외에 다른 것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60여년의 세월, 복각시점으로부터 잡아보아도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녹음인 만큼, 모든 음이 선명하지도 않고 간혹 가다 지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사람들의 기침 소리가 음악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그냥 추억의 연주일 수도, 레코딩 시대 초반을 장식한 명연주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요.하지만 이 곡의 완성은 4악장에 있으며, 그것도 마지막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주변의 풍경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묘사한 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 올라 그간 바라 보았던 모든 것을 전력을 질주하며 지나치는 전개. 이는 분명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처럼 그간 들려준 이야기들을 마지막에 가서 정리하고 해결해주는 계몽소설의 전개방식임에 틀림없습니다. 브람스는 분명 이 곡에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지요.

 

푸르트벵글러가 4악장에서 피워내는 꽃은 어느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피날레는 누구도 피워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아마 더 이상은 바라기 어려울 만큼 강렬합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질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앞선 악장에서 만들어두었던 수수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4악장을 더 놀랍게 만들어준 것은 느릿느릿하지만 바람과도 마주치고 들꽃과 새들과도 이야기하며 어느덧 산마루에 오르게 해준 소걸음입니다. 청중들은 모르는 사이에 산꼭대기에 이르러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신기하게도 푸르트벵글러의 브람스 2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을 때에만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그 순간부터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해야 마지막에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놀랍게 느껴지던 4악장을 따로 떼어내서 들으면 또 그렇게 대단찮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듣는 것과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정말이지 무슨 마법의 가루라도 뿌려놓은 게 아닐까요.

 

찾아보자면, 워낙 아름다운 곡이다보니, 굳이 푸르트벵글러가 아니어도 수려하고 만개한 연주가 꽤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꽃송이만을 보여주지 않고 꽃의 모든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지휘자는 많지 않습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지휘하는 모습이 찍힌 한 장의 흑백사진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지휘자, 어떠한 미사여구도 필요없이 그저 씨앗의 이야기로부터 아름다운 장미를 피워낼 수 있는 지휘자, 낡았지만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브람스 교향곡 2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