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비외탕 바이올린 협주곡 4, 5번 - 비비아네 하그너 :: 2012. 2. 8. 23:54

 

 

비외탕 바이올린 협주곡 5번 2, 3악장

(음원은 Okko Kamu / Lathi Symphony Orchestra와의 실황)

 

사람은 일생 동안 자기 뇌의 10%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10%도 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살면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꿈도 꾸고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며 운동도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사회 생활을 하려면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퀘스트를 매일같이 수행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 조금 쓰는 뇌용량마저도 이런저런 용도로 나눠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에만 몰입한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쓰고 간혹 천재라고 읽을 수도 있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요즘 강조하는 것이 '균형'입니다. 직장에서는 'Work & Life Balance'를 -말로만- 강조하고, 정치판에서도 앞에 '중도'가 붙지 않으면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이 떨어지죠.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잘 한다고 그것만으로 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목을 다 잘 해야 합니다(균형인지 슈퍼맨인지 모르겠지만). 음악도 마찬가지죠. 어딘가 튀고 개성 넘치는 연주는 -최소한 한국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남들보다 뛰어난 게 있어야 하는데 다른 것도 남들 이상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비비아네 하그너의 연주는 말하자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문무겸장(文武兼將)'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력적인 저음에 칼같은 테크닉, 단호한 보잉과 확신에 찬 핑거링, 그러면서도 절제된 음색과 절대로 과장하지 않는 기풍을 모두 지니고 있죠.

 

설익은 연주자들이 기술적으로 어려운 곡들을 연주할 때 나타나는 반응은 대체로 둘 중 하나입니다. 처지거나, 따라는 가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곡에 잡아 먹히거나. 하그너는 이 난관을 아주 우아하고 지혜롭게 헤쳐나갑니다. 기술이나 감정의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여유있게 잡는 모습은 30대 초반의 젊은 연주자에게서 보기 힘든 장점입니다. 그 곡이 기술적으로 아주 까다로운 비외탕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확실히 하그너의 연주에서는 탁월한 균형감각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패시지에서도 그의 프레이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김 빠지고 힘없는 연주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장작을 패는 것처럼 단호하게 치고 나갑니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서 총주를 뚫고 저 정도로 매력적인 저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주자 스스로가 확신과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브라빈스나 로열 플레미쉬 필하모닉과의 앙상블도 정밀하고 깔끔하며 완성도가 높습니다.

 

아쉬운 점은 비외탕의 협주곡들이 그것만으로는 매력을 뿜어내기 어려운 곡들이라는 점입니다. 확실히 하그너의 연주는 정확하고 뛰어나며 아름답지만, 한 가지, 광채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균형감각은 탁월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빠진 느낌입니다. 좀 더 강렬한 스펙트럼을 발산해주었으면 하는데, 어느 정도 선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올라가지 않으려는 것인지 올라가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서도 사람을 휘어잡는 매력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큰 문제입니다.

 

원인이라면 대략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하이페리온의 녹음 자체가 독주자에게 불리할지도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그간 발매된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에서는 유리 위를 미끄러지듯 하는 하이페리온 특유의 사운드가 아주 매력적인 앨범을 만들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찰현악기의 특성상 차갑고 미끄러운 소리보다는 좀 더 찰진 소리가 연주의 전달에 훨씬 유리하겠지요. 이 앨범에서 독주자의 저음은 마찰이 잘 전달되며 아주 매력적인 소리가 나오지만, 고음 부분은 너무 깨끗하고 차가운 소리가 납니다. 오케스트라에 묻혀버리기도 하거니와, 마치 귀에 걸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그림자도 없는 바람처럼 어느샌가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 버리죠.

 

다른 하나는 이 곡이 비외탕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그너의 연주는 대단히 반듯하고 모범적인 면모가 강합니다. 반대로 리즈 시절 장영주의 비외탕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미친 듯한 연주입니다. 지금 막 터져 나오는 용암처럼 뜨겁고 눈부신 연주죠. 상당히 엄숙하게 절제되고 정련된 하그너의 연주 스타일에는 애초에 2% 부족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토벤이나 브람스라면 딱 맞을 것 같네요.

 

하그너의 비외탕 연주는 분명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늘 절제되고 균형있는 연주를 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탓에 놀라운 테크닉과 기품있는 음색을 가지고서도 만족하기는 어려운 녹음이 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곡에서라면 찬사를 받아 마땅했을 '균형감각'이라는 재능이 오히려 비외탕을 막아 선 셈입니다. 협주곡 5번 3악장 말미에 터져 나오는 일성을 들으면 녹음 탓을 하다가도, 마지막 한 음에서 반이 모자라는 옥의 티를 들으면 역시 좀 더 격정을 쏟아내지 못하는 하그너에게 탓을 돌리게도 됩니다.

 

그렇지만 이 연주는 하그너의 다른 연주를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비외탕을 이렇게 연주해내는 것도 사실 아무나 못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균형 잡힌 연주자가 브람스나 베토벤을 연주했을 때 어느 정도의 퀄리티가 나올지 굉장히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매력적인 저음과 망설임없는 보잉이 있으니 아주 뛰어난 연주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하그너가 어머니의 나라에서 마침 베토벤을 연주하게 될 11월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