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 2007. 1. 2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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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노르웨이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합니다. 우리에게 북구 유럽은 항상 신비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지요.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로 많이 봐온 아름다운 피오르드,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상쾌한 숲들, 만년설에 덮여 있는 험준한 봉우리들 정도랄까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들은 항상 '거기서 거기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고,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노르웨이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그 뻔하디 뻔한 이미지에 피아니스트 한 사람을 더하겠습니다.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에 가까운 북구의 이미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약간은 거칠어 보이지만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꺼칠한 턱수염,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와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는 그대로 북구인의 외양이죠. 그리고 그의 연주 역시 그가 북구인이라는 것을 그대로 들려줍니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어딘지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배어나오는 그의 터치는, 그저 차가운 플레트뇨프나 폴리니와는 또 다른 차가움을 우리에게 안겨주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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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클래식 음악계에 새로이 나타나는 연주자들은 대개 국제적으로 유명한 콩쿨을 한두개씩 거친 뒤 앨범을 내곤 합니다. 연주자들은 빨리 성공하기 위해, 음반사들은 재능있는 인재를 발굴해서 이익을 얻기 위해 콩쿨을 이용하죠. 하지만 안스네스는 콩쿨은 전혀 거치지 않은 채로, 오로지 자신의 무대경력만으로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이 특이한 경력이 오히려 그를 주목받게 했죠.

안스네스가 유명해진 계기는 다름아닌 조국의 위대한 작곡가 그리그를 통해서입니다. 무대에서 그리그의 협주곡 a단조를 무려 50회 이상 연주했고,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까 두려워서 더 이상 그리그를 연주하지 않겠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죠. 그만큼 안스네스는 그리그에 대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스페셜리스트입니다. 협주곡 뿐만 아니라 독주곡의 연주에 있어서도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안스네스가 그리그 스페셜리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연주는 단순히 그리그에만 한정되거나, 자신의 피아니즘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레코딩한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집에서는 아주 따뜻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고, 반대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굉장히 차디찬 연주를 들려주거든요. 안스네스는 곡에 맞춰 자신의 연주를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쉽게도 이 앨범에서는, 안스네스의 그런 장점이 많이 희석된 느낌입니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은 1번과 2번의 성격이 굉장히 많이 다른데, 2번은 굉장히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반면 1번은 터질 듯한 카덴차와 열정적인 터치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곡이죠-그래서 제가 에밀 길렐스에게 빠져 버렸더랬습니다-. 이 곡을 연주하면서, 안스네스는 테크니션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길렐스의 연주에서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미스터치였는데, 안스네스는 그 점을 완벽하게 커버하죠.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CBSO와의 호흡도 잘 맞는 편이고, 오케스트라와의 균형 역시 무난합니다.

문제는 역시나 독주자의 무게감에 있습니다. 사실 안스네스는 절대로 터치가 가벼워서 문제가 될 사람은 아닙니다만, 이 레코딩에서는 이상하게도 터치가 가볍습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서, 테크닉 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묵직하게 울려줘야 할 부분에서 너무 여린 울림만을 만들어 냅니다. 훌륭한 테크닉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순간이죠. 어떨 때는 여성 피아니스트인 엘렌 그뤼모의 것보다도 약할 정도이니, 문제가 상당히 크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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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해서 사이먼 래틀 경마저도 그다지 훌륭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리딩이 원래 좀 삐쭉빼쭉하고 개성이 강하긴 합니다만, 이 앨범에서는 지나치게 뾰족한 느낌을 줍니다. 길렐스와 함께한 오이겐 요훔의 둥글면서도 탄탄한 리딩에 비하면 천지차이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어느 한쪽에 크게 치우침이 없이 균형만은 잘 맞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독주자의 힘이 부족한데 오케스트라만 힘이 넘쳐서 빠방해진다면 피아노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겠죠. 그럼 예프게니 키신과 세이지 오자와가 녹음한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처럼 완전히 망가지는 연주가 나왔을 겁니다. 둘 다 그닥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의 영역은 잘 지켜주는 연주 정도는 됐기에 다행입니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인 안스네스가 각광받는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의 조합에서 이 정도의 성과밖에 얻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입니다. 독주자나 지휘자 모두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고, 더구나 그들의 스탯(?)을 알고 다시 살펴 본다면 더더욱 만족할 수는 없는 음반입니다. 다른 작곡가는 다 괜찮은데 브람스만 죽을 쑨 걸 보면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역시 안스네스에게는 쿨하기 그지없는 그리그 레코딩이 최고인걸까요. 그래도 그에게 좀 더 좋은 연주를 바라는 것 정도는, 전혀 대단한 욕심이 아니라고 믿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