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 S.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 나탄 밀스타인 :: 2007. 2. 1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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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다들 까치집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까치야 워낙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너무 많아서 심각한- 텃새니까요. 도회지이건 시골이건 간에 어딜가나 '깟깟'하는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나무 위에 전신주 위에 흔하게 올라앉아 있는 것이 까치집이지요. '인작(人鵲)'이라는 설화도 있을 정도로 까치집은 우리에게 흔하고 친근한 정서를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까치가 집 짓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시거나 까치집을 자세히 살펴보신 분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까치집은 무려 1300개가 넘는 나뭇가지로 지어지는데, 출입구는 물론이거니와 바닥에는 푹신한 담요도 깔려있고, 심지어 지붕까지 갖춰져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고 배설물도 바로바로 빠질 수 있게 설계되었다지요. 겉보기엔 삐쭉빼쭉한 것이 다른 새들의 둥지와 다를 것이 없어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단히 과학적인 것이 까치집이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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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스타인의 연주는 까치집 같습니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거칠거칠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마치 소나무 껍질을 맨손으로 훑는 것 같았습니다. 조급하지는 않지만 굳이 좋은 소리를 내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활을 내리긋는 듯한 소리였죠. 별로 정돈된 느낌도 안 들고, 바흐의 같은 곡 연주나 무반주 첼로모음곡 연주에서 흔히 느껴지는 차분함과도 거리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마음 내키는대로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그래서 사실은 이 앨범으로 페이퍼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거칠다'는 쪽으로 쓰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열심히 들었을 때(?)의 느낌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플라타너스의 그 고운 껍질을 매만지는 느낌이었지요. 김현승 시인이나 윤성택 시인이 노래한 바로 그 플라타너스의 이미지였지요-'버즘나무'라는 이름은 잠시 저리 치워둡시다-.



……………

빗물로 흠뻑 잎들을 조율하고

가지의 탄력으로 옥타브를 넘나들기도 하면서

비 오는 내내 잎과 가지를 흔들어

우산의 공명통을 두드리는 것이다

……………

모두 돌아간 그 버스정류장

옹이 같은 귀를 열어 둔 플라타너스만 적적하다

그러면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며

보도블록에 척척 잎을 눌러보는 것이다



                                                                     - 윤성택, '플라타너스 아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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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은 다시 한 번 그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밀스타인의 연주는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 자작나무 숲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줍니다. 솨아- 하는 소리로 밝게 빛나는, 이파리 풍성한 자작나무 숲 말이지요. 아니면 더없이 시원한 대나무 숲도 괜찮겠군요. 거친 단면을 보이면서도 그 내면은 우아하고, 그러면서도 열정을 간직한 채로 소쇄한 맛이 느껴지는 연주, 그것이 바로 이 앨범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밀스타인의 연주는 삐쭉빼쭉하면서도 비가 새지 않는 까치집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헨릭 셰링이나 하이페츠 같은 -동시대의- 명연주자들을 제쳐두고 밀스타인의 이 앨범을 최고의 앨범으로 꼽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하이페츠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셰링은 좀 무감동하게 들리는지라, 밀스타인의 연주가 귀에 콕 박히는 느낌이군요. 게다가 과도한 비브라토를 자제하고, 곡 자체를 파고드는 밀스타인의 스타일은 높은 기술적 완성도와 조화를 이루며 연주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놓습니다.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 음악계에는 새로운 연주자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스타일이 출현하며, 많은 앨범들이 출시될 것입니다. 이 곡도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는 한 번쯤 꼭 녹음해야 할 교과서와 같은지라,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저도 신인들의 연주를 들으며 그에 감동하고 그들의 팬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오래된 것의 가치가 쉽게 바래지 않듯, 밀스타인의 연주도 제게 오랫동안 기억되겠지요.

오늘은 바람이 가끔씩 눈을 실어와서 쌀랑쌀랑 문창을 치고 있습니다. 날씨도 마침 바람 이는 자작나무 숲과 까치집을 쉬이 생각할 수 있도록 서늘하군요. 이런 겨울날, 밀스타인의 연주와 함께 오후의 한 때를 보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