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 슈라 체르카스키 :: 2007. 2. 1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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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음악을 연주할 때, 연주자가 지니고 있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 두 가지를 꼽으라면, 저는 '테크닉'과 '감성'을 고르겠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가지 요소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두 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곡에 대한 이해와 음악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만약 그것만 가지고 있다면 그건 단지 평론가나 매니아에 지나지 않겠지요. 테크닉과 감성만 지닌 연주자도 한쪽에 치우친 꼴이 되겠지만, 그래도 저 두 가지를 지니면 -그 품격에 상관없이- 연주가 가능하기에, 저는 테크닉과 감성이 연주자에게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 두 가지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마 대답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테크닉만 있는 연주자, 감성만 넘쳐 흐르는 연주자.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굳이 우선순위를 매기자면, 저는 테크닉을 더 중시하는 쪽입니다. 우선 그 곡을 여유있게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이 있어야 감정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테크닉 부족으로 허덕이는데 어떻게 청중들에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연주자라면 우선 뛰어난 테크닉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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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끔씩은 제 생각을 뒤엎는 앨범들이 나오곤 합니다. 기술적으로는 그리 대단할 게 없지만, 듣다보면 무릎을 치며 탄복한다거나, 감정이 절로 차오르게 되는 그런 연주들이 있지요. 그런 연주자들에게서는 단순히 '테크닉'과 '감성'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다른 점이 느껴지는데, 이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만년에 남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도, 제게는 그런 연주 중의 하나입니다.

이 앨범은 아주 고즈넉하고, 느리게 시작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답답하다고 평가하거나, 들어본 앨범 중 가장 느리다고 하는 백건우의 연주보다도 느린 편이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마치 이 곡은 이대로 연주해야 하고, 이 속도가 악보에 적힌 스코어다, 라고 주장하는 듯한, 아주 당연한 듯 여유롭게 한 음 한 음을 밟아나가는 느낌이죠. 거장의 여유랄까요, 노장의 혜안이랄까요. 느릿느릿한 박자 속에서도 음표는 빛을 발하고, 피아노 소리는 더할 수 없이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영화 '샤인'에는 주인공인 데이비드 헬프갓이 졸업연주회를 할 때, 첫 음을 누르자마자 청중들이 놀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참 오버질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게다가 라흐3번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도 맘에 안 들었고요-, 사실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놀란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설정입니까. 하지만 체르카스키의 연주를 듣는 순간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첫 음이 나오는 순간부터 저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마치 마그리트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과 같은 느낌이었지요. 화려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지만, 처음부터 전체적인 그림이 뇌리에 각인되는 듯한 느낌 말입니다.

더구나 체르카스키의 연주에서는 힘이 느껴집니다. 비록 젊은이들의 강력한 타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에게서는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 뿜어져 나옵니다. 아니, 그냥 힘이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는 것 같고, '포스'라고 해야 할까요. 특히 1악장 카덴차에서의 그 낭만적이면서도 격정적인, 강렬한 진행은 -제가 좋아하지 않는 버전의 카덴차임에도-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음표 하나하나가 귀에 들어와 박히는 것 같은 연주는, 대체 90살(체르카스키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94년)에 어떻게 이런 연주가 가능한 건지,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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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악장에서도 섬세함을 넘어 미세하다고 해야 할 정도인 체르카스키의 아름다운 연주는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2악장의 후반부는 과도하지 않은 힘으로 아주 유려하게 연주되어 대단히 아름답지요. 물론 가끔씩 힘 조절이 잘 안 되어 툭 튀어나오는 부분도 있고, 힘에 부쳐 허덕거리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멋진 진행이지요.

전체적으로 대단히 격렬할 수밖에 없는 3악장은, 아마 빠른 연주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답답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나이가 나이인만큼, 그렇게 빠르게 연주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느릿느릿한 박자에도 불구하고, 체르카스키의 연주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고, 격정적인 동시에 유려하고, 맑지만 결코 날카롭지 않은 연주. 자신이 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로맨틱 피아니스트'인지를 증명하는 듯한, 가슴을 울리는, 감성적인 하나하나의 음표들. 체르카스키의 곰삭은 연주는, 언제 들어도 동의할 수 있는 그런 연주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칭찬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사람이, 지휘자인 유리 테미르카노프입니다. 치밀함은 다소 부족하지만, 격정적이고 빠른 곡에서 특히 강점을 보이는 이 아저씨-이제 테미르카노프도 할아버지군요-는 놀랍게도, 체르카스키에게 템포를 완전히 맡기고 있습니다. 평소 그의 연주를 생각하면 이렇게 느린 연주가 대단히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 같기도 한데, 테미르카노프는 오히려 노장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독주자를 온전히 뒷받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함부로 피아노의 앞에 나서지도 않고, 지나치게 큰 음향으로 독주자를 찍어 누르지도 않으며, 느리지만 늘어지지는 않도록 오케스트라를 잘 통제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와중에도, 테미르카노프가 자기 특유의 격렬함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3악장 끝부분의 그 멋진 마무리는 테미르카노프가 만들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이 어떠하든, 지나간 것은 대부분 아름답게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수퍼 피아니스트들의 전성기에, 테크닉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힘도 그들보다 떨어지지만, 가끔씩 어딘가에 빠져들고 싶은 날이면 체르카스키의 연주가 생각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추억 속에 묻혀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90세의 나이에, 테크닉이니 감성이니 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은 저 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