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비에냐브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 2번 - 길 샤함 :: 2007. 2. 1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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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냐브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1악장


 

길 샤함은 상당히 여성스러운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외모가 동글동글 귀엽긴 하지만, 그렇다고 샤함의 취향이나 성격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그는 여성스러운 연주를 들려주는 연주자입니다. 여기에서 '여성스럽다'는 말은 당연히, 편의를 위해 사람들이 갈라놓은 개념을 그냥 가져다 쓴다는 점은 다들 양해해 주시겠지요? 샤함의 연주는 확실히 선이 가늘고 유연하니까요.

 

현재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막심 벤게로프의 연주가 '바이올린의 비르투오조'라 불릴 정도로 대단히 남성적인, 그러니까 선이 굵고 힘찬 데 비하면, 샤함의 연주는 정말 가냘프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음악 잡지에서는 샤함이 벤게로프처럼 강력한 비르투오시티를 넘보려다가 망했다-가 다시 자기 본령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는데, 연주를 들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샤함의 연주는 굵직함이나 비르투오시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죠. 오히려 바이올린하면 떠오르는 첫 느낌-깡깡이?-에 가깝달까요?

 

그래서인지 샤함의 연주는 처음과 나중의 감상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잘한다'는 생각만 들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질리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일 수록, 가볍고 즐거운 사람보다는 진중한 사람을 찾는 것처럼-저는 가볍고 즐거운 사람도 좋아합니다-, 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요? 현 위에서 가볍게 뛰노는 그의 연주는 분명 즐거운 것이고 뛰어난 것이지만, 그만큼 아쉬움 또한 큽니다.

 

비에냐브스키는 '바이올린의 쇼팽'이라 불리며 비외탕과 함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도 추앙받았던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두 곡은 모두 서정적인 멜로디를 안고 있고,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모두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품입니다. 그러면서 두 곡 모두 3악장으로 가면 다이내믹하고 신나는 악상이 전개되죠. 그래서 활놀림이 가벼운 길 샤함과, 꽤 인정받는 중견 지휘자인 로렌스 포스터, 거기에 런던 심포니의 조합은, 당연히 제게 얼마간의 기대를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샤함은 제게 꽤 큰 만족감을 안겨주었지요. 역시나 가뿐하게 움직이는 멜로디에, 심각하지도 않고, 단조임에도 우울하지 않은 음색, 내키는 대로 부담없이 긋는듯한 시원한 보잉, 짓눌리지 않고 뻗어 나가는 활달한 고음 처리. 한 마디로 이 앨범은 제가 샤함에게 기대했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앨범이'었'죠. 더구나 당시에 산 앨범들이 모두 중량급 이상의 '대박앨범'들이었으니, 붕붕 뜨는 기분에 덩달아 이 앨범도 평가가 좀더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저 좋은 느낌들이 채 두 달은 못 갔다는 점입니다. 다섯 번을 넘기면서 샤함의 보잉은 약간 지루하게 느껴졌고, 열두어 번쯤 들었을 때는 신경질적인 고음이 타이레놀을 찾게 했고, 열댓 번을 들으면서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와의 간극을 무시할 수 없었고, 스무 번을 넘어 들으면서는 오케스트라의 응집력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물론 모든 앨범이 첫 인상보다는 나중의 인상이 더 좋지 않기 마련이지만, 이 앨범은 거의 급전직하라고 해야할 정도로 인기도가 하락했지요.

 

아무래도 원인은, 역시 샤함의 간지러우면서도 뾰족한 연주 스타일이 아닌가 합니다. 가볍고 즐거운 연주는 세월이 흐르면서 묻힐 수밖에 없거든요. 기교적으로 놀라운 영역까지 확장되었던 낭만시대의 피아노 협주곡들이, 지금은 거의 묻혀버린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일이지요. 더불어 샤함의 연주는, 그 활기찬 테크닉에 대한 놀람이 일단 지나고 나면, 들으면 들을수록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듯도 합니다. 가뿐한 연주는 좋지만 자주 듣고 많이 들으면 질리는 거지요. 하지만 샤함의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는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입니다. 어쨌든 감상은 전적으로 저의 영역이니까요.

 

가장 큰 문제는 오케스트라에게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차적으로 오케스트라에 있고, 그것이 2차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로렌스 포스터는 안 그래도 가뿐한 샤함의 연주를 잡아주어야 할 자신의 의무를 무시했거나, 혹은 오해한 듯합니다. 런던 심포니의 연주가 저렇게 가벼운 데다 중심이 안 잡힌 상태로 흔들리는 것은 처음 들어봅니다. 포스터의 의도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각 파트 간의 균형도 잘 맞지 않고 불안하지만, 현악파트 자체의 균형 역시 계란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마루를 잘 깔아줘야 할 오케스트라가 이처럼 흔들리다보니, 샤함의 연주가 마음에 안 들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하고, 실력 없는 춤꾼이 무대를 탓한다지만, 아무리 실력 좋은 춤꾼이라도 여기저기 뾰족한 돌멩이가 널려있는 흙바닥에서 굴러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결국 포스터는 오케스트라만이 아니라, 독주자의 연주까지도 흔들리게 만든 셈입니다. 지나치게 두리뭉실-'두루뭉수리'가 옳은 표현입니다만 어감상 두리뭉실이 더 와닿는지라-하고 흐릿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뭐, 당연하게도 이질적입니다.

 

물론 '오케스트레이션도 순전히 취향 문제 아니냐'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이 앨범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취향을 넘어서는 편두통을 선사합니다. 도무지 독주자와의 간극이 줄어들지도 않고, 곡의 진행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거든요. 길 샤함의 연주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곡을 풀어나가기는 합니다만, 오케스트라와 맞물리다보니 좋은 연주로 받아주기가 어렵게 되었지요. 물론 샤함의 연주는 신나고 즐겁습니다만, 그만큼의 아쉬움 역시 진하게 남는 앨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