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헤르츠 피아노 협주곡 3, 4, 5번 - 하워드 셸리 :: 2007. 5. 2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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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츠 피아노 협주곡 3번



늘상 그렇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대체로 즐거운 경험입니다. 더구나 그 새로운 것이 마음에 확 닿게 좋다면 즐거움은 배가되지요.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이만큼 들었는데 아직 모르는 게 절대적으로 많다'는 느낌이 들 때가 가장 괴롭더군요(?). 다행히 그런 괴로움이 나쁜 쪽으로 나가지는 않고, '평생 들어도 모르는 게 더 많을 테니 항상 겸손하자'는 쪽으로 나아가고는 있습니다(과연).

 

하이페리온의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집'은 제게 그런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시리즈입니다-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스티븐 허프의 생상 피아노 협주곡 전집 앨범 역시 이 시리즈의 레코딩입니다-. 특히나 웬만큼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도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널리 소개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있습니다. 연주자들 역시 스티븐 허프나 하워드 셸리,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처럼 유명한 사람들도 많지만, 처음 들어보는 피아니스트들이 좋은 연주를 들려주는 경우가 많아서 저를 한층 더 즐겁게 해줍니다.

 

앙리 헤르츠(Henri Herz, 1803-1888)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습니다-자료에 따라 1806년생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연주를 배웠고, 이후 코블렌츠에서 수학을 하다가 파리로 건너가게 됩니다. 아참, 헤르츠의 본명은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z)였지만, 18세 때 당대의 모범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모셸레스(베토벤의 제자이기도 합니다)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하고 파리 콘서바토리에 입학하면서 이름을 앙리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콘서바토리 입학 첫 해에 1등상을 거머쥔 헤르츠는 젊은 나이에 이미 놀라운 기교-fashionable하고 sensational했다고 합니다-의 명연주자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200여 개의 곡들을 작곡했는데, 여덟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곡들이 모두 변주곡이라고 하는군요. 그런 영향인지 피아노 협주곡들 역시 어느 정도 변주곡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전통적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헤르츠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전기 낭만주의와 중기 낭만주의의 과도적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세 곡은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진정한 낭만주의가 시작된다'는 평을 듣는 전기 낭만주의의 후반기에 속하는 시대에 작곡된 곡들이지요. 베토벤에게서 강렬하게 표출되었던 분노-흔히 '질풍노도'라고 표현되는-는 어느 정도 가라앉고, 큰 규모에서 눈을 돌려 다시 작은 것에 호감을 드러내던 시기이지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작고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이 시기의 음악들은 대단히 파격적인 선율과 악상, 동기의 배치 등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헤르츠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약간 비극적인 선율과 급격한 선율의 낙하가 특징인데, 이는 중기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나 각 악장마다 갑작스럽게 주제가 전환되는 부분이 하나 둘씩 등장하는데, 이러한 부분의 연결은 조금 미숙해보이고, 그래서 변주곡적인 성향이 드러나면서도 어딘지 주제를 이어나가지 못하는 어색한 면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비극적인 선율미가 대단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단점이 어느 정도 상쇄되기는 하지요. 특히 협주곡 3번의 2악장과 3악장의 선율은 20세기의 뉴에이지 음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낭만주의 자체가 뉴에이지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고요- 현대적인 감수성을 물씬 뿜어 냅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곡에서 자신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하워드 셸리-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에서는 정말 의외의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는 이 앨범에서도 자신의 장기가 역시나 그러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티끌 하나 없는 유리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맑은 터치에 빠르게 이어지는 패시지에도 흔들림없는 균형감각, 무엇보다도 약간의 슬픔이 묻어나면서도 아름다운 이상향을 그리는 듯한 선율에서의 넘치는 감수성…….

 

셸리의 장기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아저씨는 언제나 자신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하는데-주로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즈와 함께 하지만, 최근 들어 녹음한 헤르츠와 모셸레스의 협주곡들은 모두 태즈메이니안 심포니와 함께 했습니다-, 그 지휘 솜씨가 또 녹록치 않습니다. 더구나 주로 속도가 빠르고 고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낭만주의 협주곡들을 연주하면서도, 언제나 중상급 이상의 지휘 실력을 보여주기에 그의 연주는 더더욱 놀랍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곡에 딱 맞는 해석을 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군요. 피아니스트로서나 지휘자로서나 말이지요.

 

물론 셸리의 해석은 때때로 너무 뻣뻣하고 힘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앨범에서는 그런 딱딱한 느낌 역시 어느 정도 해소되어 있습니다. 특히 선율을 타고 흐르는 듯한 유려한 터치는 이 앨범 최대의 장점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음색 역시 모자르지 않고 꽤 풍부한 느낌인지라, 규모가 크지 않은 헤르츠의 곡들에서는 셸리 자신의 연주가 더더욱 돋보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대개 작곡자 자신의 뛰어난 테크닉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구조적인 견고함이나 안정감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오래 가지 못하고, 이 곡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지요. 하지만 낭만주의 협주곡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은 그 아름다운 선율을 무기로, 사람들의 마음에 직관적으로 파고든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가슴에 가장 먼저 기억되는 것은 오랫동안 들어야 깨닫게 되는 심원함보다는, 즉각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율이니까요. 그리고 하워드 셸리는 이 앨범에서, 그러한 곡의 특성을 대단히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감성적인 음악을 듣고 싶어지신다면, 헤르츠를 찾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