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임동민 피아노 독주회 :: 2007. 5. 16.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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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체로 줏대 없이 행동한다는 등의 안 좋은 뜻으로 쓰이는 속담입니다만, 친구를 잘 두면 친구 따라 강남 갔다가 횡재를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 하나 잘 둔 저는 친구를 따라가서 친구가 보여주는 연주회를 보고 오는 호강을 했습니다. 연주회에 마지막으로 갔던 것이 2001년 겨울이던가요, 호암아트홀에서 있었던 파올로 판돌포의 독주회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무려 5년 반만에 연주회를 간 셈입니다-그게 벌써 5년도 더 된 일이라니, 왠지 끔찍하군요-. 정말 오랜만에 연주회라는 것을 가보는 데다 친구가 보여주는 것이고, 게다가 주인공이 쇼팽 콩쿨에서의 3위 입상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임동민이어서 기대가 컸습니다.

7시쯤 급하게 저녁을 먹고 시간에 맞춰 연주홀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관객들의 분위기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안내 방송도 없이 갑자기 임동민이 등장했습니다. 인사를 하고 피아노에 털썩 앉은 그는 객석의 불이 꺼지기도 전에, 정말 어찌보면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로 연주를 시작하더군요.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아무런 신호도 없이 연주자가 등장하다니, 아트홀 측의 실수인지, 아니면 충무아트홀에는 원래 그런 절차가 없는 건지 의문이 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주자나 관객들의 집중을 위해 아트홀 측에서 분위기를 어느 정도 정돈해주는 쪽이 좋은데 말이죠. 결과적으로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연주가 시작됐고, 이것이 이날 연주회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임동민 - Newsis 자료사진입니다
첫 곡은 리스트의 '에스파냐 랩소디(Rhapsodie Espagnole)'였습니다. 리스트의 곡답게 기교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곡이지요. 그런데 연주자의 상태가 좀 이상해보였습니다. 우선 마른 체구에 비해 옷이 너무 커보였습니다. 연주복을 입었는데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품이 많이 남아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고, 옷깃이 길었는지 연주 초반에 손을 털어내다가 피아노에 손이 강하게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의자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높이마저 안 맞는 것 같았습니다. 컨디션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던 임동민은 당연히 연주에 집중하지 못했고, 이런 분위기는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해져서 연주자와 관객이 모두 집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집중을 하지 못하다보니 연주의 흡인력도 반감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임동민의 연주는 제대로 된 연주라고 하기에는 테크닉만으로 밀고 나가는 모습이 확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의 기술적 완성도는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른 듯 보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주로 기억하는 면모와는 달리 쇼팽 뿐만 아니라 리스트의 곡에 있어서도 좋은 연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할 정도였습니다.

첫 연주가 끝나고 잠시 퇴장했던 임동민은, 다음 곡인 슈베르트의 '네 개의 즉흥곡'을 연주하기 위해 다시 등장해서는, 아니나다를까, 너무 높았던 의자의 높이를 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조금 집중을 하는 듯하더군요. 이 부분에서는 오른손의 명확하고 깨끗한, 그리고 유려한 터치가 돋보였습니다만, 프레이징이 약간 불안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몰입하기는 힘들었는지 간혹 집중이 흩어지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하지만 받침대 역할을 해주는 엄지손가락의 튼실함이 좋았고, 자기만의 해석을 고집하는 듯한 모습 역시 보기 좋았습니다. 다만 조금 길다 싶은 페달링이 깔끔하고 유려한 터치의 강점을 해치는 모습이 자주 보여 아쉽더군요.

15분 간의 휴식이 끝난 뒤, 드디어 사람들이 가장 기대했을 쇼팽의 '4개의 스케르초' 연주가 시작됐습니다. 이번에도 별다른 신호도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임동민이었습니다만, 2부에서는 드디어 몰입에 성공하는 것 같더군요. 스케르초 1번에서는 능숙한 페달링과 균형잡힌 곡의 해석, 그리고 부드러운 악상 전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왼손으로 연주하는 저음부의 음향이 지나치게 뭉개지는 느낌이었고, 이것이 상대적으로 맑고 차가운 고음부와 대조되며 거슬리더군요. 페달링과 왼손과 오른손 각각의 균형은 꽤 멋진 편이었지만, 이 셋을 조합하니 그다지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프레이징 역시 조금은 불편했습니다만, 이것을 자기만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체적으로 강하고 박력있는 독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사인해주는 임동민씨 - Zeiss ikon / Nokton Classic 40mm with Agfa Vista 100
스케르초 2번에서는 기저음의 타건이 강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저음의 배음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뭉개지지 않는 페달링이 돋보였는데요, 특히나 열정적인 연주 스타일과 맞물려 굉장히 멋졌습니다. 게다가 의외로 피아노나 피아니시모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강약의 전환이 이미 상당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청명한 음색 속에 저음과 고음이 각각의 개성을 발했지만, 그 사이가 동떨어진 듯한 느낌과, 고르지 못한 프레이징은 아쉽더군요. 그렇지만 역시나 마이 페이스를 고집하는 해석이 독창적이었고, 자기 색이 확실한 터치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스케르초 3번 역시 뜨거운 연주였는데, 뜨거움이 겉으로 발산되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는 완숙함이 느껴졌습니다. 넘쳐흐르지 않고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터치 역시 좋았고요. 하지만 여기서도 불균형한 모습이 눈에 띄었고-특히 연속된 패시지에서-, 페달링과 터치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또 각자의 소리가 확실한 양손 사이에서 타협점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이들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 찾아낼 수 있는가가 앞으로의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

이날 연주의 백미는 아마 스케르초 4번이 아닌가 합니다. 스케르초 4번은 시작부터 꽤 특이했는데, 의외로 부드럽고 약간 늘이는 분위기의 연주였습니다. 보통보다 조금 무겁고 부드러운, 독특한 해석이었지요. 예상 외의 진행이 계속되고, 강하게 나가다가 숨을 죽이는 완급조절과, 알찬 소리를 내주는 왼손, 그리고 묵직한 해석이 상당한 흡인력을 뿜어내며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조금은 여유없이 성마른 공간이 많은 것 같았고, 페달링이 조금 지나친 듯했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연주를 마친 임동민은 대단히 피곤한 기색으로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관객들은 그런 그를 두 번이나 무대에 다시 세웠고, 그는 리스트의 사랑의 꿈과 쇼팽의 폴로네즈를 연주했습니다. 제대로 연주하기에는 힘이 들었는지 약간 급하게 연주한 뒤 퇴장했고, 여러 번의 앙콜을 고사하고는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했습니다. 사인회에서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자꾸만 불러내는 관객들이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곤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연주자는 엔터테이너가 되어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어야겠지만, 관객들 역시 연주자에게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날 연주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특히 산만한 관객들의 분위기나, 준비가 덜 된 듯한 연주홀의 분위기는 연주에 몰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재였지요. 더구나 연주자 자신의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아보였고, 그것이 연주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아 많이 아쉬웠습니다. 덧붙이자면, 충무 아트홀에 가본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는데, 연주홀의 음향 자체가 너무 성마르고 잔향이 극단적으로 짧은 느낌이었습니다. 임동민도 이런 것을 의식했는지 연주 내내 페달링을 길게 늘이는 모습이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음을 뭉개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날 연주를 통해 임동민이 단순한 쇼팽 연주자로만 남지 않고 어느 정도 비르투오소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색이 확실하고, 열정적이고 강렬한, 그러면서도 유려하고 가뿐한 터치는 그 가능성을 입증해 주는 단서들이었지요. 다만 앞으로 얼마나 균형잡힌 연주를 할 수 있느냐가, 피아니스트 임동민의 성장방향을 결정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