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 힐러리 한 :: 2007. 5. 14. 02:4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강속구 투수는 태어날 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야구격언-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구력은 본인의 노력으로 갈고 닦아서 어느 정도까지는 정확한 코너웍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시속 150km 이상을 던질 수 있는 팔은 노력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는 말이지요. 물론 제구력 역시 선천적인 능력이 있어야 잡히는 것이고 웬만한 노력으로는 역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노력을 해도 될 수 없는 강속구 투수야말로-제구력은 노력하는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구속은 어떤 노력을 해도 껏해야 5km 정도 올라갈 뿐입니다-, 말 그대로 만들어질 수 없고 태어날 뿐인 선수일 겁니다..

저 말을 음악에 대비해 보자면, 제구력은 아마도 테크닉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적 재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 초짜라고 해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의 테크닉은 익힐 수 있으니까요. 제가 연주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테크닉은 연습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어려운 곡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아직도 초보티 벗으려면 10년은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야구에서의 강속구에 대비할 수 있는 개념은 무엇일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악기를 다뤄보신 분들은 답을 예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연습하고 노력해봐도 남들을 따라갈 수 없고 남들이 나를 따라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요. 음악에서의 강속구는 바로 '음색'입니다. 어떤 악기를 다루든, 음색은 남과 같아질 수는 없으니까요. 같은 악기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자세와 같은 방식으로 연주해도, '나의 음색'은 '다른 이의 음색'과는 다른 색채를 띠게 됩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자면, '좋은 음색을 지닌 연주자는 태어날 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도 될 것입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좌절스러운 말이지만, 나름대로 악기를 배워가면서 느끼는 것은, 음색은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물론 사실이라기보다는 일천한 경험과 지식과 재능 때문일 가능성이 좀  크긴 합니다-.

힐러리 한은 바로 그 좋은 음색을 지닌 연주자입니다. 잡지에서 그를 소개할 때 항상 맨 앞머리에 나오는 말이 '미인'인데, 사실 -미인인지 아닌지 잘 분간이 안 가는- 그의 외모보다 더 앞에 나와야 하는 찬사는 바로 이 음색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헐떡거릴만도 한 패시지에서도, 그의 음색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간을 가득 채우는 큰 밀도를 지니고 있거든요. 높은 음역으로 올라가도 미끄러지거나 뻗치지 않고, 모든 음역에서 꾹꾹 눌러담는 듯한 침착하고 도타운 음색, 그것이야말로 바로 누구보다도 특별한, 힐러리 한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파가니니의 협주곡처럼 테크닉 면에서나 음색 면에서나 악상을 전개하기가 어려운 곡은, 힐러리 한에게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쳐보일 수 있는 곡임에 틀림없습니다. 누가 파가니니 아니랄까봐 수많은 기교와 변화무쌍한 이미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이 곡은, 독주자에게나 오케스트라에게나 쉽지 않은 곡이니까요. 자기 연주만 하기에도 어려운 마당에 오케스트라와의 호흡까지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협주자로서의 기량을 보여주기에 아주 적당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곡 전체가 그렇지만, 1악장은 특히 중심을 잃어버리기 쉬운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처음부터 워낙 신나게 쿵쾅거리는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등장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자기 페이스를 찾지 못하고 분위기에 말려들어갈 수 있으니까요-사실 1악장에서 '촹촹!!' 하며 신나게 연주해주기만 해도 충분히 즐겁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힐러리 한은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갑니다. 물론 분위기는 여전히 밝고 흥겹지만, 좀 전까지 까불며 뛰어다니던 오케스트라는 어디 가고, 마치 여왕님을 시중드는 시종들처럼 독주자를 받쳐 주거든요. 이러한 '군림'이 가능한 것이 바로 힐러리 한의 음색 덕분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빠르게 날아다니면서도 밀도를 전혀 잃지 않는 독주자가 위에 버티고 있으니, 오케스트라는 그저 여왕님께 충성할 수밖에요.

앞서 이 곡이 음색 면에서도 어렵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2악장 때문입니다. 1악장의 밝은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대단히 비극적인 시작과 함께 낭만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여주는 2악장은, 독주자가 '나는 단순한 테크니션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고, 또 그런 면을 보여주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다른 악장에서 필요한 뛰어난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사실 저는 2악장이야말로 이 곡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힐러리 한이 좋은 음색을 지닌 연주자라는 것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 2악장에서 잘 드러나지요. 가슴을 저미는 듯한 소리가 등골을 훑고 내려갑니다.

3악장의 악상지시는 'spirituoso(활기차게 혹은 생생하게)'인데,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약간 늘어지는 감도 있지만, 힐러리 한의 연주만큼은 활기참 그 자체입니다. 특히 고음에서의 깔끔한 처리가 인상적이지요. 곡을 연주하는 내내 특유의 내밀하면서도 묵직한 음색을 유지하고, 동시에 놀라운 테크닉을 보여주며, 그렇다고 분위기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활기차게 이끌어주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지휘자인 이지 오우에는 일반적으로 세밀한 묘사에 강한 일본인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곡 특유의 '쿵쾅거림'에서는 조금 힘이 딸리는 모습이 보이고, 또 오케스트라의 연주 자체가 어린아이의 걸음처럼 불안불안한 모습도 종종 나타나지만, 그래도 작은 소리가 필요할 때와, 미세한 떨림의 표현 같은 것에는 대단히 능숙하고 뛰어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독주자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는 겸허함에도 칭찬을 조금 더 얹어주어야겠지요.

힐러리 한의 음색은, 정말 '천재라는 게 있긴 있나보다'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고, 따라가기 어렵겠다 싶을만큼-물론 저는 바이올린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깊은 지문을 남깁니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재능이 있다고 해서 겨우 스물 일곱의 나이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서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결국 재능을 꽃피우게 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이니까요-우리에게도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재능이 우리의 노력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무수한 노력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단순한 재능으로 머물지 않게 해 온 힐러리 한, 앞으로의 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