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브람스 첼로 소나타 - 안너 빌스마 :: 2007. 2. 1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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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바로크 첼로 연주를 들을 때의 장점은 아마도,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그 음색의 생경함일 것입니다. 옛 시절의 악기를 그 시절의 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오래된 책들을 먼지를 털어내며 들춰보는 경험과도 같겠지요. 원전 연주에 대해서는 수많은 견해와 오해들이 있고, 또 수많은 조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옛 연주'는 언제나 저에게 어두워가는 무렵의 아련한 그림자처럼 다가옵니다.

안너 빌스마의 연주를 얘기함에 있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앨범은 물론, 그가 두 번에 걸쳐 녹음한 J. S.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집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이 점점 더 푸르게 깊어가는 이 계절, 어쩔 수 없이 손이 먼저 가는 것은 역시나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이더군요. 약 10년 전에 발표된 이 앨범은 여전히 빌스마 특유의 아련함으로, 가을이면 저를 설레이게 만듭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청명한 가을 하늘보다는 낙엽이 쌓인 쓸쓸한 오솔길이 떠오르는 앨범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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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너 빌스마는 그 업적과 활동에 비해 과소평가되곤 합니다. 바로크 첼로라는 '좁은' 영역에서 활동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많지 않은 인터뷰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제자인 비스펠베이의 활동이 워낙 왕성하기 때문인지, 혹은 너무 잔잔하게 퍼지는 그의 음색 때문인지, 빌스마는 '바로크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라 불리며 그 영역을 제한당해 왔죠. 하지만 '로스트로포비치' 운운하는 것은 빌스마에게는 음악적으로는 존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독일 뿐만 아니라, 음악계에서의 그의 위치를 고려해 보아도 정당하지 못한 호칭입니다. 현대악기와 고악기로 세력이 나뉘는 음악계에서, 빌스마는 양쪽에서 존경받는 몇 안 되는 연주자인 데다, 원전연주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음악적 해석에 있어서도, 그에게 굳이 로스트로포비치와 관련된 수식을 붙이는 것은 그저 평자들의 편협한 음악관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할만큼, 빌스마는 나름의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헤이그 출신인 빌스마는 여러 콩쿨을 휩쓴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그가 현대보다는 옛 악기-바로크 첼로와 피콜로 첼로 등등-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는군요. 어느 날부터인가 '이렇게 해서는 청중들을 즐겁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 마침 -빌스마와 함께- 1세대 원전 연주자라고 할 수 있는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만나게 되었답니다. 이후로 그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옛 첼로에 주력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원전 연주의 거장 빌스마가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그가 현대 첼로에 반감 아닌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과장된 현대 첼로의 주법 때문이었을 겁니다. '연주자 자신이 연주를 하면서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청중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현대의 연주자들은 지나치게 자신의 연주 자체에만 집중하여 원래의 곡이 지닌 의미를 퇴색시키는 경우가 많지요. 최근의 곡이라면 모를까, 바흐나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면서 지나치게 거대한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테니까요-물론 이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저도 이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원전 연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살펴보겠습니다-.

빌스마의 음색은 그래서인지, 작고 세밀하고 순수합니다. 크고 묵직한 소리를 내기보다는 악기 자체의 울림만으로 소리를 내고, 최대한 비브라토를 자제하지요. 때문에 그의 악기는 지극히 순수한 울림만을 전달하고, 보잉 역시 크지 않기 때문에 강렬한 음색과는 거리가 멉니다. 덕분에 때로는 그 지나친 울림이 부담스러운 현대 첼로와는 확연히 다른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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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세르베'를 사용한 브람스의 소나타 앨범에는 빌스마의 주법이 농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빌스마는 마치 낙엽을 자박자박 밟는 듯한 소리를 내고-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비브라토를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대단히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지요. 물론 이런 분위기는 소나타 e단조의 1악장에만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울림이 지나치지 않고 소리가 과장되지 않는 빌스마의 특징은 전곡에 걸쳐 나타납니다. 램버트 오르키스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파데레프스키가 사용했다는 1892년산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했는데, 오르키스 역시 과장되지 않은 연주로 빌스마를 잘 받쳐줍니다. 그의 음색 역시 굉장히 영롱한 편이어서, 빌스마의 울림이 적은 연주와 잘 맞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그 음색입니다. 빌스마의 소리는 순수함 그 자체여서 부담없이 다가옵니다만, 오히려 그 순수함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울림이 크지 않다보니 갑자기 쌩뚱맞은 소리가 나올 때도 있고, 바로크 첼로 특유의 쌉쌀한 소리가 목에 걸릴 때도 있지요. 비브라토를 너무 자제하다보니 좀 울려야 할 것 같은 부분에서는 그냥 맥 빠진, 풀잎을 훑는 듯한 가벼운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겁니다. 이런 경향은 소나타 e단조에서 많이 보이는데, F장조에서는 좀 완화되지만 여전히 울림이 부족한 모습입니다-사실 이런 점이 옛 첼로가 지니는 최대의 약점이지요-.

다른 한 가지 문제점은 악기 간의 조합입니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는 과연 '어떤 악기를 사용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곡이고, 이 앨범은 그러한 논란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빌스마의 앨범이 받았던 비판은 바로 '첼로는 1701년산, 피아노는 1892년산'이라는 겁니다. 그 사이에 있는 200여 년의 간극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물론 연주자들 나름대로의 해명이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니기는 합니다만, 이는 여전히 비판의 소지로 남아 있습니다-어차피 누가 옳다고 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굳이 빌스마의 연주가 지니는 문제점이라고는 할 수 없겠군요-.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빌스마의 연주는 여전히 고아합니다. 원전 연주란 그의 말처럼, 어차피 '그 시대로의 완벽한 복귀가 아닌 가능성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는 굳이 원전 연주를 고집하는 쪽도 아니고, 현대 악기로 연주하는 옛 음악들도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빌스마의 앨범이 어느 악기로 연주된 것이건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빌스마의 음색이 지니는 가치는 여전히 특별하기에, 그 순수한 소리가 가끔씩은 부담스럽다고 해도, 쓸쓸한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연주는 앞으로도 오래, 제 마음을 잔잔하게 울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