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613, D784, D960 - 스티븐 허프 :: 2007. 2. 1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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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마왕'의 강렬한 어두움? '겨울 나그네'에서의 저음의 부드러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의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즐거움? 약간은 음울하면서도 로맨틱한 '미완성 교향곡'의 그 느낌?

제가 들은 슈베르트는 언제나 약간은 밝으면서도 완전히 밝지는 않은, 유화처럼 희부윰한 우윳빛 안개가 살짝 퍼져 있는 얕은 구릉 같은 느낌이었습니다-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마치 위쪽의 재킷 그림처럼, 장조 곡들은 참 밝고 맑고 투명하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것이 숨어 있는 듯하고, 단조 곡들은 아주 우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격정을 쏟아내지도 않고, 조용하고 느릿느릿한, 부끄러운듯 흘러가는 얕은 시냇물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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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런 느낌은 슈베르트에 대한 선입견에서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슈베르트의 인생은 참으로 우울하고 칙칙한, 가난한 음악가의 삶, 바로 그것이었거든요.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남들에게 인정받아보지 못하고, 즐거운 음악을 추구했지만 그의 인생은 단 한 번이라도 즐거웠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힘들게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괴테의 시에 곡을 붙여 보내봤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하기도 했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자신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주 긍정적인 태도로 삶을, 그리고 음악을 즐겼지요. 슈베르트는 딱딱하거나 잘난 척하는 음악보다는, 누구나 다, 작곡하는 자신이건 듣는 사람이건 모두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슈베르트의 곡들은 이중적입니다. 슬프면서도 기쁘고, 기쁘면서도 슬프지요. 힘겨운 현실이 눈에 선하지만, 그 와중에도 고귀한 보석처럼 묻혀 있는 그 이중적인 뉘앙스. 그리고 그걸 느끼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입니다.

슈베르트만큼 듣는 사람에게 자신의 곡을 맡겨주는 작곡가가 또 있을까요? 그는 어려운 구조적 이론을 이용해 곡을 만들지도 않고, 어마어마한 악상으로 부담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소나타들은 이름은 소나타이지만,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의 연속이지요.

제가 스티븐 허프의 앨범을 기대한 것은 아마도 슈베르트의 소나타들이 지니는, 그런 특징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허프의 터치는 묵직한 곡들을 연주하기엔 가녀리지만, 생상이나 훔멜의 곡들에는 더없이 잘 어울렸거든요. 그래서 슈베르트의 CD를 사면서도 그런 점을 기대했고, 그는 이번에도 역시나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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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역시 톤이 가볍지만 차갑지 않다는 점입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무겁고 둔중하고 강렬하거나, 아니면 가볍고 맑고 차갑고 날카롭거나, 두 부류로 가를 수 있는데, 허프는 딱 그 중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톤이 분명히 가볍고 약간은 높게 들리고 또 맑은데도, 절대 날카롭거나 차갑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하지요. 그래서 고음 부분, 혹은 빠른 전개부를 듣더라도, 허프의 연주는 목에 걸리는 느낌없이 아주 편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이중적인 곡들에서, 그의 그런 장점들은 더할나위 없이 빛을 발합니다.

허프의 터치는 짤랑거리는 풍경-풍경은 아니고,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바람불면 짤랑짤랑하는 그 장식품 말입니다-소리처럼 가뿐합니다. 좀 더 파고들자면, 살포시 다가와서 얼굴을 어루만지고 볼을 붉히며 도망가는 봄바람 같달까요? 마치 옆집에서 연습하는 피아노 소리처럼, 부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그는 약간은 심각한 악상에서도, 조금은 가벼운 악상에서도, 어느 감정에도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빠져나갑니다. 허프의 연주는 슈베르트가 의도했던 대로, 음악을 구조적으로 해석하려 들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무게를 두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기에 심각하지 않게, 저녁무렵쯤이면 강가에서 볼 수 있는 살가운 빛무리처럼, 듣는 사람을 즐겁게 만들지요.

그래서 허프의 슈베르트 연주를 듣고 있자면, 물론 허프의 다른 연주들도 그렇지만, 굳이 굉장한 심미안이 없더라도 보고 있으면 즐거워지는 한 폭의 유화를 감상하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무한한 캔버스 위에 피아노 소리가 펼쳐지고, 따뜻한 터치로 선율과 선율이 연결되면서 풍경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하는 건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이 들으시기에 따라 밝은 냇가의 그림이 될 수도, 약간은 음울한 산기슭의 그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음악은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니까요. 제가 완성한 그림에는 얕은 구릉 위에 따스한 햇살이 엷게 내리쬐는군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