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메트너 피아노 협주곡 2번 - 니콜라이 데미덴코 :: 2008. 11. 24. 21:5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 어느 쪽이든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이안 감독의 영화들을 가리키는 말 중 하나가 '스타일리쉬'하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이야 어쨌든 대체로 칭찬을 받곤 하는 이안의 '스타일'은 단적인 예로 와호장룡만 잠깐 살펴봐도 알 수 있는데, 고등학생 시절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뻔하디 뻔한 강호의 이야기에 전형적인 무림고수들이 나오는 이 이야기를, 어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칼과 주먹의 대결을, 이안은 놀랍게도 대단히 세련된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더구나 도교의 핵심적인 사상이 함축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갈무리되어 있으니, -너무 함축적이어서 어찌 보면 유치하지만- 이 영화에는 이야기 면으로나 시각적인 면으로나 '스타일리쉬'하다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립니다.

음악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이안 감독의 영화들처럼 스타일리쉬한 음악들이 가장 많이 쏟아진 시대는 아마도 낭만주의 시기일 것입니다. 주제와 멜로디는 직관적이지만 그 안의 동기와 표현들은 대단히 은유적이고 은밀한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지요. 듣자마자 바로 이해할 수 있을만큼 빠르게 다가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촌스럽거나 투박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좀 더 듣다보면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이 매력적인 것은, 이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작곡가들이 저마다 다르고 새로운 이야기를 '스타일리쉬'하게 풀어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콜라이 메트너(Nikolai Karlovich Medtner, 1880-1951) 역시 그런 낭만주의 스타일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1880년 12월 24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10살까지는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고 그 뒤로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수학했는데, 스무 살 무렵에는 이미 당대 최고의 연주자로 인정받던 라흐마니노프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0대 초반에 연주자 생활을 접고 작곡에만 전념했는데, 덕분인지 피아노 곡이 중심이 되는 메트너의 곡들은 동시대 뿐 아니라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메트너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곡입니다. 당시 친구였던 메트너와 라흐마니노프는 항상 비교되곤 했는데, 함축적이고 고아한 맛이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부자들의 메트너'로, 조금 더 직설적이고 인상적인 메트너의 곡은 '가난한 이들의 라흐마니노프'로 불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협주곡 2번 역시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4번과 구조적으로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재미있게도 메트너는 이 곡을 라흐마니노프에게 헌정했고,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메트너에게 헌정했습니다).

하지만 닮은꼴인 가운데에도 메트너와 라흐마니노프는 각자의 곡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아냈고, 둘은 더 이상 서로의 닮은꼴이 아니라 독자적인 스타일을 지닌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메트너는 늘 새롭고 남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던 다른 낭만시대 작곡가들과는 달리 '유행'이나 '새로운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언제나 고집하던 것은 바로 낭만주의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싫어하던 고전시대의 소나타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낭만시대의 음악어법과는 동떨어진 듯한 사람이 오히려 당대의 모든 유행들을 제치고 음악의 첨단을 달렸다니 이것도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아마도 메트너가 언제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악상만으로 독창적인 곡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메트너가 수많은 낭만시대 작곡가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새롭고 다르긴 다르지만 대체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고 어딘지 비슷비슷해 보이는 다른 낭만주의 악곡들과 달리, 메트너의 곡은 1악장의 시작만큼이나 완전히 새롭고 강렬합니다.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의 변주와 반복, 변화의 흐름을 이어주는 화려한 음표와 악상들은 스타일리쉬 정도를 넘어 -메트너가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fashionable하다는 말이 어울리지요.

스타일이 좋든, 간지나는(?) 패션 아이템을 뽐내고 있든,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 곡은 당연히, -굳이 악보를 보지 않더라도- 연주하기에 꽤 어려운 곡입니다. 잘못 연주하면 복잡한 멜로디는 지저분하게 들릴 수 있고, 서정적인 부분은 지루하게 들릴 수 있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주고 받는 부분이 워낙 많아 둘 모두 기량이 좋아야 제대로 연주할 수 있거든요. 완급조절도 중요하거니와 터치나 음색 자체가 무디다면 연주하지 않느니만 못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콜라이 데미덴코의 맑고 깔끔한 터치와 음색은 딱 '적당'한 정도입니다. 너무 짤랑거려서 가볍거나 너무 무거워서 늘어지거나 하지 않는 정말 적당한 수준이지요. 독특한 리듬을 잘 타야 맛깔나게 연주할 수 있는 1악장이나, 역시나 독특한 강세를 잘 이해해야 하는 3악장의 연주도 아주 좋지만, 역시나 이 앨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은 바로 2악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미롭고 서정적인 피아노의 독주에, 어느샌가 멜로디에 스며들었다가 기분좋게 잔잔해지는 구성의 반복은 마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느꼈던 파도를 다시 듣는 느낌입니다.

화려한 테크닉에 멋들어진 멜로디 라인까지 완성한 데미덴코도 좋지만, 그런 연주가 가능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 준 지휘자 예르지 막시미우크(이렇게 읽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와 BBC 스코티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훌륭합니다. 숨가쁜 부분도 여유있게 처리하고, 1악장의 엇박자도 무리없이 잘 넘어갑니다. 2악장에서도 오케스트라는 데미덴코의 서정적인 연주를 좀 더 빛나게 해주며 그런 분위기를 잘 만들어줍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내 저녁노을이 지는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호른 주자의 곰삭은 연주 솜씨와, 중반의 아주 긴 패시지를 수월하게 처리하는 클라리넷 주자의 기량에는 절로 감탄이 나오는군요.

작고한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우리에게 메트너는 그가 지니는 가치만큼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메트너는 -그의 친구 라흐마니노프가 그랬듯이- 당대 최고의 작곡가 중 하나였고, 동시대의 작곡가들로부터도 리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연주자이자 베토벤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작곡가로 인정받을 만큼 음악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평가하는 말들을 몇 구절이나마 소개하며 메트너에 대한 평가를 대신할까 합니다.

"(메트너는) 영원한 예술의 신성한 법칙을 지키는 확고한 수호자이다." - 작곡가 글라주노프
"그는 러시아의 살아있는 베토벤이다. 그는 베토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가의 작품을 계속해서 창조해내고 있다." - 평론가 사바네예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