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 빅토리아 물로바 :: 2007. 1. 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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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1983년, 빅토리아 물로바는 남편과 함께 택시를 타고 구 소련과 핀란드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호텔방에는 그녀의 수백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를 그대로 놔둔 채였죠. KGB는 그녀가 자신의 애기(愛機)를 두고 서방으로 망명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 덕에 물로바는 철의 장막에서 너무도 유유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본인의 마음은 많이 떨렸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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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바의 연주는 대단히 멜로딕합니다. 아주 유려하고 서정적이어서, 그야말로 전형적인 여성적 연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구 소련 탈출, 남편과의 결별 등 그다지 평온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생여정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차분한 연주를 들려줍니다. 투명하고 서정적인 물로바의 음악은 우리가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의 큰 별로 기억하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그것과는 거의 반대되는 지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피아노로 치자면 마치 미하일 플레트뇨프의 연주를 약간 다듬어 놓은, 투명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우연히도 그녀가 내놓은 첫번째 크로스오버 앨범의 제목이 'Through the looking glass'군요-소설 제목이긴 하지만 말이죠-. 한 마디로 그녀의 연주는 투명한 유리를 들여다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플레트뇨프의 앨범이 나올 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되듯이, 물로바의 앨범 역시 호평과 함께 만만치 않은 비판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의 연주는 예쁘고 잘 다듬어져 있지만 자신만의 개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연주처럼 들리기도 하거든요.

물로바의 단점은 가끔씩 크게 드러나서 그 연주를 그저 예쁜 데 지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그것이 오히려 자신만의 개성이 되기도 합니다. 물로바의 연주는 러시아 음악의 계보에 속하지 않는 느낌을 주거든요. 클래식 음악계가 미국 대 유럽으로 편성되어 있는 현재 상황에서, 물로바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느 전통에서건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만의, '물로바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표트르 안더체프스키와 함께 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집은 그러한 그녀의 장점이 잘 드러나 있는 앨범입니다. 사실 이 곡은 브람스의 다른 작품들, 교향곡이나 피아노 협주곡, 심지어는 첼로 소나타 같은 작품들보다 굉장히 작고 아담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브람스 연주에 기대하는 스케일이 장대하고 웅장한 연주보다는 매끄럽고 서정적인 연주가 더 잘 어울리죠-제 사견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물로바의 브람스 소나타 연주는, 마치 알프스 산골소녀처럼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요한나 마르치의 연주보다 한결 듣기 편합니다. 마르치의 연주는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지만, 앨범이 오래된 데다 여기저기 쿡쿡 쑤시는 듯한 느낌이어서 굉장히 불편했거든요. 게다가 물로바는 브람스 협주곡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열정적인 모습도 자주 보여줍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대립구도가 상당히 극명하게 드러나는 브람스의 소나타에서 이런 점은 분명 상당한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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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타 1번의 시작부터 물로바가 뿜어내는 서정적 멜로디에는 사람을 묘하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단정하고 깔끔하고 예쁜 물로바의 흡인력은 넘쳐나는 애송이들과 비슷할 것 같지만, 그들과는 분명히 다른데다 생각보다 강합니다. 거기에 예쁘게 연주하는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항상 지니고 있는 알 수 없는 포스까지도, 이 음반에서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떤 악장에서는 가끔씩 무서워질 때도 있지요.

젊은 연주자임에도 대단히 완숙한 터치를 지닌 표트르 안더체프스키는, 이 앨범에서도 역시 안정된 연주를 들려줍니다-이 친구가 우리에게는 그다지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아닙니다만, 사실 대단히 실력이 좋고, 유명한 일화도 지니고 있답니다. 그 일화는 다음 기회에 그의 연주를 따로 다룰 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물로바의 연주를 받쳐주면서도 적절하게 바이올린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물로바의 연주가 좀 더 단단해 지도록 이끌어줍니다. 사실 이 레코딩이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절반 정도는 안더체프스키에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안더체프스키의 훌륭한 연주는 이 앨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물로바와 안더체프스키의 조합은 상당히 훌륭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받쳐주면서도, 곡이 지닌 대립성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둘의 레코딩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만, 그러기엔 두 사람 다 너무 유명하고 너무 바쁠 것 같군요. 서정성 면에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굉장히 잘 된 음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