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 엘렌 그뤼모 :: 2007. 1. 2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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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나 다시 바다로 가리, 그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가리.

큼직한 배 한 척과 지향할 별 한 떨기 있으면 그뿐.

박차고 가는 바퀴, 바람의 노래.

흔들리는 흰 돛대와

물에 어린 회색 안개 동트는 새벽이면 그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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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콜라나 사이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 달에 다섯 캔을 마실까 말까 하죠. 그 톡 쏘는 맛이 목에 안 맞기도 하고 건강에 좋지 않다는 소리도 많이 들려오는지라, 청량음료는 되도록이면 마시지 않으려고 합니다. 웬만하면 그냥 물을 마시고 말죠. 하지만 가끔씩은 저도 청량음료를 찾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오늘처럼 방수 안되는 천 케이스에 첼로를 넣어서 마구 날려대는 부슬비가 돌아다니는 길을 뚫고 레슨을 다녀온 날에는, 그냥 물 가지고는 갈증이 풀리질 않죠. 그럴 때 타는 듯한 목을 달래주려면 대략 두 가지의 대안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원한 맥주이고, 둘째는 시원한 콜라나 사이다죠. 그래서 저는 오늘 냉장고에 들어있던 콜라를 벌컥 벌컥 들이켰습니다. 몸에 안 좋고 뭐고, 가끔씩 이래주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걸요.

그뤼모는, 이런 날 마셔주는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은 연주자입니다. 독특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연주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생활도 독특한데, 이 사람은 늑대 보존사업에 몇 년째 투신하고 있습니다- 마시면 톡 쏘는 청량음료, 아니면 배스킨 라빈스의 슈팅스타 맛 그대로죠. 분명 그녀의 연주는 최상의 것이라고 하기엔 미흡한 점이 꽤 많고, 아주 좋은 연주만을 모으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음반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뤼모의 연주는 아주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발랄하지요.



나 다시 바다로 가리, 달리는 물결이 날 부르는 소리,

거역하지 못할 거칠고 맑은 부름소리 내게 들리고,

흰 구름 나부끼며 바람 부는 하루와 흩날리는 눈보라,

휘날리는 거품과 울어대는 갈매기 있으면 그뿐이니.



그녀의 연주에 대한 호평은 바로 이 시원함과 발랄함에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 곡을 이렇게 연주할 수도 있다니!'하는 식이죠. 그만큼 그뤼모의 연주는, 마치 '얌체공'처럼 통통 튀어다닙니다. 이제는 지난 세기의 앨범에 들어가 버린 쿠르트 마주어와 함께한 베토벤의 협주곡 4번에서도, 그녀의 재기발랄함은 가뿐한 톤을 타고 상쾌하게 흩뿌려집니다. 한마디로 '아주 쾌활한 베토벤'이 된 셈이죠.



나 다시 바다로 가리, 정처없는 집시처럼.

바람 새파란 칼날 같은 갈매기와 고래의 길로

쾌활하게 웃어대는 친구와 즐거운 끝없는 이야기와

지루함이 다한 뒤의 조용한 잠과

아름다운 꿈만 있으면 그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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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골라 듣는 레코딩이 몇 가지 있는데, 그뤼모의 베토벤 4번은 그 중 하나입니다. 메이스필드가 노래한 것처럼, 그녀의 연주는 쾌활하게 웃어대는 친구, 아니면 파도가 시원하게 몰아치는 바다와 같은 느낌이어서, 짜증스럽던 기분도 금방 좋아지거든요. 그래서 사실 음반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이 음반은 제가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입에 달다고 해서 좋은 음식이 아닌 것처럼, 그뤼모의 연주도 쾌활하고 즐겁긴 하지만 꼭 좋은 연주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지닌 최대의 단점은 성급함입니다. 사실 그뤼모의 또 하나의 장점은 여성임에 비해 상당히 묵직하고 호쾌한 터치인데, 이 앨범에서는 성급함으로 인해 장점이 희석되어 버리고 그저 가벼움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전작과 후작인 브람스나 라흐마니노프의 연주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점으로 드러납니다. 엄청난 음향을 내는 대규모의 오케스트라와 대결해야 하는 협주곡에서 터치가 너무 가벼워진다면 그건 그냥 오케스트라에 묻혀버리고, 결국엔 음향기기에 의지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요. 더구나 그녀가 오케스트레이션이 묵직하게 흘러가는 곡들을 주로 녹음하는 상황에서, 방해가 되는 성급함은 당연히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해석이 지나치게 발랄하다보니 멋대로라는 평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그뤼모의 별명이 '여자 굴드'라죠-.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생각만 해도 우울해져서 미칠듯한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보다는 자주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성급함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연주는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특히 생명력이 넘쳐나고, 그에 더해 뭔가 색감이 느껴지는 듯한 느낌을 주죠. 커플링으로 수록된 베토벤의 소나타 30번과 31번은 그녀의 장점이 단지 쾌활함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테크닉도 뛰어나서 웬만한 난곡도 잘 풀어나가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죠.

결국 그뤼모의 앞날은 성급함을 자제하고, 자신의 장점을 죽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좀 더 묵직한 해석을 얼마나 잘 덧붙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레코딩을 들어보지 못한지라 그녀가 최근에 어떠한 연주를 들려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발전 가능성만큼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이력과 독특한 매력을 지닌 그뤼모가, 자신의 스타일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 꽤 관심이 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