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 S.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 피터 비스펠베이 :: 2007. 1. 2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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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첼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J. S.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하나의 성서와도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흘러나오고 익숙하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고 저 끝자락에 있는 듯한 아련한 느낌이랄까요.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흐에서 시작해서 바흐로 돌아오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떤 '질서'를 내포하고 있는 바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정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들이 언젠가는 베토벤 소나타와 바흐의 평균율을 목표로 하듯이, 첼리스트들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목표로 잡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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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을 녹음한 수 많은 첼리스트들 중에서 비스펠베이의 위치가 돋보이는 것은, 그가 바로크 첼로를 사용했다는 데 있지는 않습니다. 바로크 첼로 연주야 스승인 안너 빌스마의 경우도 있고, 오히려 더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버린 파올로 판돌포의 비올라 다 감바 연주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모음곡 6번은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피콜로 첼로를 사용했습니다. 특징있는 악기를 떠나서, 비스펠베이의 연주는 독특합니다. 카잘스의 묵직함, 로스트로포비치의 정직함, 빌스마의 순수함, 푸르니에의 기품 등 지금까지 바흐를 연주해 온 많은 대가들의 모든 연주에서 한발짝 물러나서 자신만의 울림을 창조해 냅니다.

아마 이 음반의 처음, 그러니까 가장 유명한 모음곡 1번의 프렐류드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연주에는 생명력이 넘칩니다. 예, 비스펠베이의 연주는 분명, 지나치게 무게를 잡지 않고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는 듯한 생기발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허밍을 하는 듯한 부드러운 울림과 자연스러운 리듬-그의 연주에는 분명 리듬이 살아있습니다-은 다른 연주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그래서 마치 사람이 완전히 배제되어버린 느낌마저 드는 빌스마의 연주와는 달리, 비스펠베이의 연주에는 분명 사람이 들어 있다는 느낌, 활동성이 확실하죠.

그의 장점이 단지 생동감, 혹은 생명력에만 있다면 이 음반이 그렇게 많은 상을 타지는 못했을 겁니다. 비스펠베이는 절제할 줄 아는 연주자입니다. 완전히 개방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적당히 닫혀 있습니다. 만약 너무 열려버렸다면 순수하지만, 빌스마와 다를 바 없는 연주가 되었겠죠. 하지만 비스펠베이는 적절한 위치에서 음색을 조절함으로써 자신이 품고 있는 생동감을 좀 더 강력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비스펠베이의 바흐는 편안합니다. 강하게 다가오지만 자연스러운 생명력, 이건 정말 큰 장점이죠. 다른 연주자들의 바흐가 뭔지 알 수 없는 무게감 때문에 그에 짓눌리는 느낌이라면, 비스펠베이의 연주에는 듣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습니다-물론 다른 연주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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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비스펠베이가 바로크 첼로의 덕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그의 연주가 생명력을 갖는 데는 분명 악기와 거트현이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현은 마치 알갱이가 손에 하나가득 만져지는듯한, 가는 모래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질 수 있겠지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공기보다 손에 만져지는 모래알이 우리에게 좀 더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죠. 게다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긴장된 저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바락 노먼의 장점이 그로 하여금 편안하면서도 절제된 저음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이 앨범에서 찾을 수 있는 불만은, 비스펠베이가 가끔씩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다는 점 정도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것은 좋은데 운지가 빗나가는 모습을 보이곤 하죠. 하지만 눈에 띌 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실수가 있긴 하지만 들을 만 하다는 얘깁니다.

비스펠베이는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연주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색채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꽤 많은 경우에, 스틸 현을 쓴 연주에서 비스펠베이는 자신의 기량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그의 한계일 수도 있고, 달리 본다면 그 곡과는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다른 음반들의 성패를 떠나, 비스펠베이의 두 번째 바흐 녹음은 그 독특한 사운드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는 수작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비스펠베이 최고의 연주로 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