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나프라브니크 교향적 협주곡 - 예브게니 소이표르찌스 :: 2008. 3. 9. 01:16





저는 안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급격한 변화나 새로운 것과 맞닥뜨리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지요. 그래서 밥을 먹을 때에도 자주 가는 식당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커피나 차도 늘상 마시던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만날 때도 갑작스럽게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그렇다고 친한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여행 가는 것은 좋아하지만(순전히 사진 찍을 거리가 생겨서)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한 마디로 꽤나 폐쇄적인 성격이지요-그래도 히키코모리나 자폐적 증세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저에게 몇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새로운 음악, 새로운 연주자, 새로운 작곡가와 마주하는 일입니다. 언제나 듣던 음악을 CD가 닳도록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전혀 모르는 작곡가와 연주자의 음악을 듣는 것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매력이거든요(여기에 '음악은 역시 CD를 사서 들어야 제맛'이라는 고집 때문에 통장잔고는 언제나 바닥을 칩니다). 하이페리온에서 여러 해째 출시되고 있는 '낭만시대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는 매번, 저의 조갈을 만족스럽게 해소시켜주곤 합니다.

 

나프라브니크(1839-1916)는 체코 출신의 작곡가로, 음악의 낭만주의가 꽃피던 시기에 태어나 그 절정기와 후기 낭만주의 시기 모두를 살다 간 사람입니다. 본적이 체코인데다 프라하에서 음악적 기초를 쌓았음에도 불과 30세에 마린스키 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을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지휘와 오르간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와 오페라에 있어서도 대가로 손꼽혔으며, 러시아에서는 '5인조'와 맞먹을 정도의 명성을 얻었고, 또 그만큼 러시아 음악계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사람이지요. 스트라빈스키로부터는 '완벽한 명확성과 객관성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그가 작곡한 곡을 들어보면 나프라브니크를 로만티시즘의 전범으로 치켜세운 스트라빈스키의 말이 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가장 중시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음악이야말로 이상세계를 오감으로 구현할 수 있는 종합예술'이라는 점인데, 이를 위해서는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전개와 구조가 필요합니다. 나프라브니크는 일정한 톤과 절제된 전개방식으로 이를 구현하는데,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운 선율을 사용하였고, 여기에 더해 여러 악기들을 대단히 효과적인 방식으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갑작스레 쌩뚱맞은 전개가 보이는데, 이는 A-B-B'-C-B" 식으로 이어지는 교향곡적 순환구조를 도입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1악장 후반부에 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튀어나오고 그대로 다음으로 넘어가는 앞주제의 변주가 그러한 예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프라브니크의 음악이 전-중기 낭만주의가 후기 낭만주의의 견고한 구조주의로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담고 있는, 과도기적인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주제부의 변주가 다음주제의 받침목 역할을 하는 구조는 브람스의 교향곡에서 특히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를 두고 본다면 나프라브니크가 이 곡의 제목을 '교향적 협주곡'이라고 지은 것이나, 순환-변주적 구성방식이 다분히 낭만주의의 이상적 음악인 '교향악적 음악'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곡은 연주하기에 꽤 어려운 곡입니다. 낭만주의 협주곡의 특징인 난해한 기교는 물론, 철저한 자기절제와 구조적 이해 없이는 연주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겉으로 드러나는 선율은 화려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야말로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는' 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대회에 입상하며 러시아와 네덜란드, 영국 등의 주요 유럽무대에서 연주경력을 쌓고 있는 소이표르찌스는 이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한 것 같습니다. 말끔하고 유려한 터치는 플레트뇨프류의 차가운 터치와는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왼손으로 반복적인 패시지를 대단히 깔끔하고 절제되게 연주하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고난도의 선율을 부담스럽지 않게 소화해냅니다. 왼손과 오른손의 역할분담이 잘된 것은 교향악적 구조의 충실한 재현을 의미하고, 그 결과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구조적으로는 꽤 튼실한 곡 본래의 성격이 잘 드러나게 됐습니다. 역시 러시아 출신인 알렉산드르 찌또프 역시 곡에 대한 이해가 깊은 듯한 해석을 보여주는데, 독주자의 왼손과 역할분담이 잘 이루어지면서도 치고 나와야 할 곳에서는 확실하게 나와주는 모습, 그리고 대단히 조율이 잘 이루어진 현악군의 베이스먼트가 인상적입니다.

 

이 앨범의 곡들은 모두 이 앨범이 최초의 레코딩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나프라브니크의 곡이 -다른 낭만주의 협주곡들과 마찬가지로- 그 가치에 비해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프라브니크의 협주곡은 충분히 아름답고 깊이 있으며, 소이표르찌스와 찌또프는 그것을 찬연하게-최초의 레코딩이라고 하기엔 대단히 명석한 해석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앨범에서 처음 접하는 연주자와 지휘자였지만, 제게는 몇 년 동안 들어온 연주자들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