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베토벤 교향곡 4번 - 카를로스 클라이버 :: 2008. 5. 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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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4번 1악장


 

자신들이 발 붙이고 있는 행성이 엄청난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살아가면서, 이쯤되면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속력에 둔감해질만 한데도, 우리는 여전히 빠른 속도에 감탄하고 때로는 경탄을 보내곤 합니다. 그리고 간혹, 어쩌면 종종, '빠른 것'을 '좋은 것'과 혼동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속성 자체가 더 크고 더 높고 더 빠른 것을 선호하게 되어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과연 '빠른 것'이 여과되지 않은 채 곧바로 '좋은 것'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베토벤 교향곡 4번은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과는 달리 상당히 어려운 곡입니다. 우선 기술적으로 상당히 잘 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파트마다 빠르게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패시지는 결코 가벼이 보아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첼로의 경우에는- 어느 포지션을 잡아도 물 흐르듯 진행하기가 어려운 탓에, 하이 포지션에서 능숙하게 옮겨다닐 수 없다고 엄지를 잘 사용할 수 없다면 제대로 연주하기가 어렵다고 보아야 할 정도입니다. 현과 현을 바쁘게 오가야 하는 보잉은 차라리 비무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곡을-당대의 어느 연주자는 이 곡을 '악몽'이라고 표현했다지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아니 '미친 듯한'이라는 표현이 좀 더 딱 들어맞을만한 속도로 풀어버린 사람이 있으니, 바로 예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입니다. 그의 기인적 풍모와 탁월한 해석은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 연주는 저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클라이버가 빠른 곡에서는 워낙 더 빠르게 달려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달리는 게 아니라 숫제 오케스트라 전체가 날아다니더군요.

 

3악장까지는 그래도 그런대로 '좀 달리네' 하는 느낌입니다. 클라이버가 제대로 미치는 부분은 바로 4악장입니다. 현의 경우 활의 움직임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왼손의 움직임만 보자면 가장 움직임이 많은 부분이죠. 아니 그럴 것도 없이, 그냥 퍼스트 바이올린의 파트보를 보면 그야말로 '콩나물 대가리'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아, 다행히 16분 음표입니다. 그런데 빠르기는? 이런, 알레그로네요.

 

오케스트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점은, 비바체보다 알레그로가 오히려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 전엔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별 감각이 없었는데, 막상 이것을 몸으로 느끼고나서 보니, 단원들의 탄식과 한숨을 이끌어내는 것은 오히려 비바체보다도 알레그로더군요. 그런데 하필 안 그래도 어려워보이는 4악장의 빠르기는 'Allegro ma non troppo', 즉 '빠르되 지나치지 않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실력이 떨어지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게는 이보다 더 울화통 터지는 말도 없을 겁니다. 대체 얼마만큼 빨라야 빠른 것이고, 어느 정도로 해야 지나치지 않은 것이냐, 그건 순전히 지휘자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클라이버는 3악장까지 눌러두었던 질주본능을 4악장에서 꺼내듭니다. 그것도 자켓 사진처럼 씩 웃으면서, 환희에 차서, 기뻐 죽겠다는듯 말입니다. '이만하면 많이 참았다'는 듯이, 여름철 장맛비를 꾹꾹 눌러담아 채웠던 댐이 갑작스런 폭우에 물을 방류하듯이, 아니 그보다는 맨 꼭대기까지 올라간 롤러코스터가 아찔하게 떨어져내려가듯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씨익 웃으면서, 수십억짜리 카드판에서 막판을 노리고만 있던 갬블러가 로스티플을 꺼내드는 것처럼 한순간에 모든 것을 풀어내 버립니다.

 

그래서 클라이버의 막판 질주는 성공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연주를 듣고 '바이에른 슈타츠오케스터가 이렇게 엄청났던가'할 정도로 경악했습니다만, 글쎄요, 클라이버의 해석에 대한 느낌은 그야말로 '글쎄'입니다. 빠른 것은 좋습니다만, 네, 저도 물론 빠르고 경쾌하고 호쾌하고, 뭐 그런 연주들을 좋아하고 그런 곡들을 좋아합니다만, 이 연주에서 클라이버는 너무 자기만의 방식으로 곡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사실 다 좋습니다. 제가 또 클라이버를 좀 좋아합니까? 또 이 정도 속도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단원들을 이끈다는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음색도 좋고 균형도 좋고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의 알레그로는 너무 빠릅니다.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아야 할 부분이 오히려 '알레그로, 죽을 힘을 다해 빠르게'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러다보니 '좀 빠른'듯한 1~3악장에서는 유지되던 균형이 4악장에서는 많이 무너집니다. 빠르게 달리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곡에서는 그런 허용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곡을 쓰던 1806년, 베토벤은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불멸의 연인'에게 그 유명한 편지를 쓰던 것도 바로 이 때입니다. 사랑에 빠져 있었지만, 아직 사랑을 이루지는 못한, 사랑의 환희를 바라보았지만 아직 그 환희에 이르지는 못한 상태였죠. 그리고 이 시기는 또한 베토벤이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기 직전의 시기이기도 합니다-최초의 낭만주의 곡으로 꼽히는 것은 이 곡과 함께 작곡 중이던 베토벤의 교향곡 5번입니다-. 낭만주의의 단초가 약간 보이지만, 몸통은 지극히 고전적입니다. 낭만적이고 아름답지만 철저히 절제된,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변주와도 같지요. 그렇기에 격렬한 어조로 뭉친 것을 터뜨리는 낭만주의적 화법은 이 곡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4악장은 앞에서 제시되는 감정 모두를 유머와 기쁨으로 터뜨리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클라이버는 지나치게 격렬합니다. 이 시기의 베토벤이라면, 적어도 균형과 절제라는 미덕은 잘 지켰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클라이버는, 'Allegro'는 검은 색으로, 'ma non troppo'는 붉은 색으로 표기한 -자필 원고에 쓰여 있는- 베토벤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좀 더 베토벤의 기쁨과 즐거움과 유머에 초점을 맞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환희와 확신이 가득한 연주를 보여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곡은 어떤 면에서는 클라이버가 남긴 또 하나의 명반이 되겠지요-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명반으로 꼽습니다-.

 

이 음반이 명반이냐 아니냐, 좋은 연주냐 아니냐의 선택은 오로지 듣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듣는 이가 어떻게 베토벤을 이해하고, 어떻게 클라이버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점수는 천차만별이 되겠지요-속도를 얼마나 즐길 수 있느냐, 하는 점도 중요한 문제가 되겠습니다-. 다만 제게는, 바이에른 슈타츠오케스터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또 해석 자체의 파괴력에 대한 경탄에도 불구하고, 그간 들어왔던 클라이버의 비길 데 없이 훌륭한 음반들에 비해 여러 모로 아쉬운 녹음으로 다가옵니다. 클라이버는 아무래도 쾌활하고 빠른 연주를 위해 자기 본래의 장점이던 악기군 하나하나의 세밀한 묘사와 생명력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빠른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닌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