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바버 바이올린 협주곡 - 조슈아 벨 :: 2007. 1. 2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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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조슈아 벨은 완벽하게 미국의 가치에 부응하는 연주자입니다. 잘 생긴 외모에 어릴 때부터 확연히 드러난 천재성,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노력까지, 3박자를 모두 갖춘 그야말로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미국인'이죠. 미국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는 어느 분야에서건 벨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엄청난 센세이션을 몰고 왔던 릭 엔키엘을 메이저리그의 조슈아 벨이라고 얘기하면 대강 어림짐작이 될까요? 거기에 자신만의 확고한 장점도 지니고 있고, 음악에 대해 열린 태도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굵직한 상까지 여러 번 탔으니, 이만하면 20세기 후반을 빛낸 스타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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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의 연주는 완벽하게 도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절제된 보잉과 탄력있고 완벽한 운지, 멜로딕하고 예쁘장한 고음처리까지, 미국적인 음악이나 그 가치에 대해 특별히 반감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좋아할 만 합니다. 문제는 벨의 장점이 확실하다보니 그만큼 그가 잘 연주해낼 수 있는 레퍼토리도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모차르트 협주곡 3번과 5번에서는 그의 매끄럽고 예쁜 소리가 잘 먹혀 들어갔지만, 브람스 협주곡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동의하지 않을 분도 있겠지만, 미국 연주자들의 한계는 웅장하거나 강렬한 독일 레퍼토리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일 작곡가들을 좋아하는 저는 미국 연주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요. 사실 조슈아 벨의 인기는 그 잘 생긴 외모에서 적어도 25% 정도는 먹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옆의 사진은 히카르도 카카와 닮았군요), 완전히 미국적인 가치 아래에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긴 하기 때문에, 바이올리니스트만으로서의 벨의 가치는 어쩌면 지나치게 고평가된 주식과 같은 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벨이 자신의 장점을 확실히 알고 그것을 발전시키려 노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벨을 꽤 좋은 연주자로 보고 있습니다. 또, 이 사람은 꽤 좋은 연주자인 게 사실이지요. 일정한 레퍼토리 안에서 말입니다.

아마도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여러분이 느낄 수 있는 조슈아 벨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곡일 것입니다. 굉장한 테크닉을 요하는 난해함과 어느 정도 낭만적인 선율이 어우러져 있거든요. 바버의 협주곡이 레코딩으로나 라이브로나 그다지 인기 있는 레퍼토리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조슈아 벨은 자신의 낭만적이고 예쁘장한 멜로디로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힘을 보여줍니다. 1악장은 마치 모차르트 3번과도 같은 느낌을 줄만큼 예쁘게 포장되어 있고, 그 흐름은 2악장까지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고음의 처리도 부드럽고, 특별히 탓할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이 곡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강렬한 포스가 뿜어져 나오는 3악장일 겁니다. 벨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화려한 테크닉으로 음반을 수 놓습니다. 악보를 본다면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을듯한 스피드임에도 대단히 정확하고 정제된 연주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균형을 잃지 않고 있죠. 이처럼, 난곡일지라도 자신만의 밸런스를 잃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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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자기 스타일대로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동시에, 3악장에서는 크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이건 이 레코딩에서뿐만 아니라 조슈아 벨의 연주 자체에서 항상 드러나는 문제점인데, 그의 연주에는 힘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곡 자체가 그다지 힘을 분출하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3악장만큼은 강렬한 포스를 내뿜어주길 바랬는데, 곡을 예쁘게 궁굴리는 그에게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같은 곡을 연주한 힐러리 한의 레코딩을 들어보면, 똑같이 도시적이기 그지 없는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한에게서는 어떤 강력한 힘이 느껴집니다. 오히려 한이 남자 같고 벨이 여자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니까요.

데이비드 진먼이 이끄는 볼티모어 심포니는, 사실 이 곡에서 비중이 크지 않습니다. 곡 자체가 오케스트라보다는 바이올린 솔로에 올인하다시피 하기 때문입니다만, 그에 더해 진먼 스스로가 오케스트라를 아주 극소화시킨 느낌입니다. 확실히 여러 장르에 잘 맞는, 다르게 말하자면 확실하게 잘 하는 레퍼토리가 없는 볼티모어 심포니에 적합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벨이 절대로 음량이 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나 적합한 선택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군요.

벨은 1998년 데카를 떠나면서, 마지막이 된 이 음반에 그라모폰 스티커를 선물로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이 음반은 조슈아 벨의 장점을 훌륭히 드러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벨은 클래식 음악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역이용해서 여러 장르에 도전하고 있기도 하죠. 앞으로 그의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주목해봐도 될 듯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