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빌리 엘리엇 :: 2007. 2. 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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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신파'라는 말은, 'New Wave'를 뜻하는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저 드라마는 너무 신파적이다', '눈물이나 짜내는 신파조의 영화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영어로 써 놓으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 단어는, 1930년대에는 새로운 물결이었을지 모르지만, 21세기, 지금의 한국에서는 굉장히 촌스럽고 천대받는 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신파조'의 드라마와 영화에 울고 웃곤 하지요. 방송 3사에서 그 복잡한 구성과 이야기를 지닌 아침 드라마를 꾸준히 내보내는 것도, 사람들이 결국엔 누군가의 비극이나 웃음을 보고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 엘리엇(Billy Elliot)'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전형적인 신파극입니다. 자상한 엄마는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치매로 고생하시고, 광부인 아빠와 형은 탄광노조의 파업으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고 있지요. 일단 엄마가 없는 집의 어린 소년이라는 것만으로도 '엄마 없는 하늘 아래'가 생각나며 뭔가 콧등이 짠해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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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는 전지전능하신 일부 평론가 각하들께서 짧게 뭉개버리는 것처럼, 신파조에 기대 관객의 눈물을 짜내는, 그저 그런 영화는 아닙니다. 분명 눈물이 나게 만들 장면인데도 어처구니 없게 꼬아버려서 결국에는 웃음이 나오게 만들죠. 할머니와 함께 돌아가신 엄마의 무덤에 가서 슬픈 음악이 배경에 깔리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다른 무덤에 가서 말을 겁니다. 빌리가 형 토니에게 '형,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어?'라며 심각하게 물어봤더니, 토니는 'fxxk up!!'이라며 분위기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분명한 신파극을 살짝 뒤틀어버려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인물들 간의 교집합이 대단히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굵직한 주제가 있다는 거죠. 그건 바로 음악과 춤입니다. 음악과 춤은 감독이 설정한 인물들 간에 상호관계의 기저를 형성하고, 관계의 교집합을 만들어주면서, 결국 빌리를 중심으로 하는 커다란 원을 만듭니다. 이 관계도는 던킨 도넛의 츄이스티 같은 모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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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과 대립합니다. 심지어는 자신과도 대립하죠. 집안의 내력인 복싱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꾸 끌리는 발레를 해야할 지, 혹시 이러다 게이가 되는 건 아닌지 말이지요. 게다가 가장 친한 친구놈은 엄마와 누나의 옷을 몰래 입고, 립스틱을 칠해대며 정말로 게이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와는 원래 대화가 없고, 역시 무뚝뚝한 형은 자기 LP를 좀 들었다고 성질만 버럭 냅니다. 할머니는 툭하면 정신을 놓고 어딘가 엉뚱한 곳에 가 있기 일쑤고, 그나마 자기 재능을 알아본 발레 선생과는 생활 수준의 격차로 불만이 생깁니다. 이 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빌리 엘리엇'의 신나는 음악들은 주로 빌리 혼자만의 장면에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빌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빌리는 우선 자신과 타협을 합니다. 발레를 한다고 해서 게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자주 춤을 추게 되지요. 처음에 빌리가 춤 같은 것을 출 때는 춤이라고 볼 수도 없는, 그냥 박자 맞추기에 지나지 않지만, 스스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빌리의 춤은 점점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 갑니다. 그리고 이럴 때 강하고 흥겨운 비트의 락 음악이 뒤를 받쳐 주지요.

이런 빌리를 그나마 이해해 주는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가 몇 차례 읊조리는 '사람들은 내가 연습만 한다면 발레리나가 될 거라고 말했어'라는 대사는, 그냥 치매의 결과인 듯 보이지만, 꽉 막힌 가정에서 빌리를 지지하는, 유일한 출구이지요. 그리고 할머니와 빌리의 교집합은, 빌리가 막대기를 가지고 박자를 맞추는 장면이 프레드 아스테어의 화려한 스텝과 엇갈리면서 드러납니다.




빌리를 이해해 주는 또 다른 사람은 다름 아닌 게이가 되어가는 친구인데, 이 친구는 빌리가 가족들과 대립하고, 발레에 대한 자신의 꿈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버지나 형과 크게 싸웠을 때 항상 옆에서 큰 힘이 되어 주지요. 더구나 춤추는 빌리에게 박수를 쳐주고, 멋져 보인다고 말해주는, 빌리의 첫 평론가-그것도 호의적인- 역할을 맡아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빌리가 아버지와 싸우고 나서 밖에 나가서 'Town called malice'에 맞춰 탭댄스를 출 때 그것을 지켜보고, 크리스마스에는 체육관에서 함께 춤을 추며 서로의 교집합을 찾죠. 이렇게 자신을 인정해주는 친구에게, 빌리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의 성 정체성을 인정해주는 뽀뽀를 선사합니다(결국 친구는 정말로 게이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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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키워주는 발레 선생, 윌킨슨 여사와도, 역시 음악을 통해 화해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I love to boogie'라는 댄스를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으며 서로를 이해하죠. 특히 강을 건너면서 보이는 더햄 지방의 풍광에 백조의 호수가 들리는 장면은, 상당히 독특한 감상을 전해줍니다. 윌킨슨 여사와 빌리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역시 발레인데, 이 공통점은 나중에 빌리와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모든 교집합의 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빌리와 토니, 아버지와 빌리, 그리고 아버지와 토니의 관계입니다. 토니는 윌킨슨 여사가 집으로 찾아와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할 때 가장 심하게 반발하지만, 이 대립 역시 음악에서 그 해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빌리가 윌킨슨 여사와 함께 체육관에서 'I love to boogie'에 맞춰 춤을 출 때, 토니가 집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기타를 치는 동작을 흉내내는 장면이 교차편집 되어있죠. 이들의 숨어있던 우애는 영화의 막바지에 가서야 제대로 드러납니다. 바로 런던으로 떠나는 버스를 타는 빌리에게, 토니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이지요. 여기에서도 토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버스가 떠날 때가 되서야 빌리에게 보고 싶을 거라며 인사를 합니다. 하지만 버스 유리창에 막혀서 그의 말은 빌리에게 들리지 않지요. 말해도 들리지 않는 형의 사랑, 음, 이런 걸 보면 신파적인 요소가 꽤 있긴 하지요?

가장 중요한 관계는 역시 아내도 없는 집을, 힘겨운 탄광노동을 하며 홀로 이끌어 가야 하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홀로 지고 가야하는 아버지와, 빌리의 관계입니다. '남자라면 역시 복싱!'이라며, 발레를 하는 아들이 게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이지만, 크리스마스에 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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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빌리를 보고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되지요. 그리고 빌리는 춤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아버지 앞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하며 표현해 냅니다. 바로 왼쪽에 걸린 사진이 그 장면입니다. 아버지는 빌리의 춤을 보고는 아들을 탄광촌에서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죠. 그리고 빌리는,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었던 바로 그 음악과 그 춤으로, 로열 발레 스쿨의 실기시험에 임합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아들의 합격소식을 알리러 아버지가 달려가는 길은 빌리가 춤을 추며 걷던 길이고, 그는 빌리가 탭댄스를 출 때 신었던 신발을 신고 있지요(발이 얼마나 작길래). 결국 음악과 춤이 빌리와 아버지의 소통의 통로로 쓰인 겁니다.

토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감독은 이 부분도 빠뜨리지 않고 보기 좋은 교집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파업의 수위를 놓고 토니와 아버지는 크게 대립하고, 심지어는 아버지가 토니를 때리기까지 하지만, 이 갈등 역시 잘 풀리게 되죠. 런던행 버스를 태우기 위해 터미널에 빌리를 데려다 줄 때, 아버지는 친구와 인사를 하느라 꾸물대는 빌리를 보고 '빨리 가지 않으면 늦는다'며 수선을 피웁니다. 그러자 토니는 '아빠, 제발 아줌마들처럼 굴지 마세요'라며 나무라죠(?). 그런데 마지막 장면, 빌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런던에서 지하철을 타고가는 늙은 아버지와 30대가 된 토니는, 역할이 정반대로 바뀝니다. 아버지가 자꾸만 느리적거리자, 토니는 예전에 자기가 아버지를 구박했던 것마냥, 아줌마처럼 수선을 피우는 겁니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아들의 모습, 뭔가 굉장히 흐뭇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중엔 빌리도 그 길을 따라가겠지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최종적인 교집합을 만들어주는 음악은 백조의 호수입니다. 윌킨슨 여사에게서 비롯된 이 음악은, 영화 전체를 건너뛰어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죠. 빌리가 주연을 맡은 공연은 다름아닌 백조의 호수이고, 아버지와 형, 그리고 마이클이(흑인 남자 애인과 함께) 와서 그 공연을 봅니다. 결국 윌킨슨 여사와의 교집합이었던 백조의 호수가, 츄이스티 같은 모양으로, 빌리와 다른 인물들을 연결해 주는 셈이지요. 마지막 부분의 인상이 강렬한 건 아마도, 그 공연이 '남자들만의 백조'로 유명한 매튜 본의 발레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강렬한 라스트 신으로, 감독은 음악과 춤이 영화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 한 것 같습니다. 물론, 꽤 크게 성공한듯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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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엇'은 사실, 신파극입니다-앞에서 말해놓고 뒤에서 뒤집는 버릇 또 나왔습니다-. 극의 구조를 보자면 신파극이라고 하는 게 틀린 말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진부한 신파극이라고만 하기에는 흡인력이 상당한 영화지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춤과 음악이 있고 말입니다. 신파적인 스토리를 한 소년의 감동적인, 그리고 재미있는 성장영화로 만들어 낸 1등 공신은 역시, 제이미 벨(빌리)의 춤솜씨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센스 넘치는 편집 실력일 겁니다. 꼭 한 번 보면서, 그 음악과 춤에 빠져보시길 추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