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베토벤 명 피아노 소나타집 - 알프레드 브렌델 :: 2007. 2. 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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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사진 기술의 발달로 거의 자연과 같은 총천연색의 색감을 낼 수 있는 21세기에 와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흑백 사진을 찍습니다. 미니홈피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사진첩의 꽤 많은 사진들이 흑백 사진이지요. 사진전에 가 보더라도 화려한 컬러 사진만이 전부가 아니고, 어둑어둑한 흑백 사진들도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습니다. 자연과 같은 색은 분명 아니지만, 차분하고 조용하며, 오히려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러운' 흑백 사진. 알프레드 브렌델은 바로 이런 흑백 사진과 같은 연주자입니다.

브렌델의 연주에서는 인공적인 맛이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의 연주에는 몇몇 피아니스트들이 내뿜는 그야말로 장려한 기교도 보이지 않고, 피아노 현이 끊어질 듯한-요즘엔 이상하게도 비르투오시티라는 어긋난 표현으로 종종 사용되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딱히 자신만의 독특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막 태어난 심장처럼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브렌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고, 그의 연주는 많은 곳에서 환영받는 이유는, 아마도 흑백 사진이 여전히 사용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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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에 호감을 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브렌델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여러 차례 녹음하기도 했고-이미 두 차례의 전집 녹음을 했습니다-, 이 곡들은 그의 연주회 목록에 자주 포함되며, 사람들에게는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라며 인정받고 있기도 하지요. 아마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이나 음악 동호회 등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누구 연주를 들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한다면 십중팔구 그 답 안에 브렌델의 연주가 들어가 있을 겁니다.

이 앨범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 표제가 붙어있는, 그러니까 우리 귀에 익숙한 유명한 소나타만을 추려 놓은 것입니다. 비창에서 열정에 이르기까지, 쉽게 들을 수 있는 곡들이 갈무리되어 있지요. 그래서 전집을 사기에는 가격이 너무 부담스럽거나, 전집을 듣기에는 눈꺼풀의 압박이 심하거나, 혹은 유명한 곡만 듣고 싶거나, 아니면 브렌델의 연주를 대강 알고 싶을 때에-결국엔 웬만하면 모든 경우에- 가볍게 들을 수 있어 좋은 음반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일곱 곡을 모두 하나하나 평해보고 싶지만, 그러자니 스크롤의 압박도 심할 테고, 브렌델의 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엇비슷하기 때문에, 굳이 따로 언급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전체적으로 윤곽만 잡아 보겠습니다. 이 앨범에서 보이는 브렌델의 특징은 한 마디로, '특징 없음의 특징'입니다.

브렌델에게는 특징이 없어요. 곡을 들으면 '아, 이건 브렌델의 연주구나'하고 느낄 수 있는 점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특징이랄 수 있는 점들이 서로 파쇄되는 성질을 갖고 있거든요. 브렌델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역시 두 가지, 나름대로 울림이 풍부한 음량과, 대단히 엄격한 정격주의적인 해석을 들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울림이 좋은 풍부한 음량과 정격적인 곡 해석. 저는 이 두 가지가 어울려서 시너지 효과를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풍부한 음량은 감정이 풍부하게 넘쳐나는 연주자에게 잘 맞는 특징이지, 딱딱하고, 어떤 때는 팍팍하다고 느껴지는 브렌델에게는 그다지 맞아 떨어지진 않는 것 같거든요. 물론 그나마 너무 단단한 해석을 적당히 해소해주기는 하지만요. 그러다보니 브렌델의 특징들은 상쇄되어 버리고, 이렇다할 특징없이 곡이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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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이 지닌 문제는, 울림이 좋은 걸 넘어서서 지나치게 저음이 강조되다 보니, 곡의 분위기가 아예 몽환적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베토벤 소나타가 다 이런 줄 알았어요. 나중에 다른 사람들-특히 리처드 구드처럼 활발하고 명민한 터치를 지닌 연주자-의 연주를 들어보니 전혀 다르더군요. 굳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이래야 제격이다'하는 기준을 제시하려 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리고 굴드의 템페스트 연주처럼 지나치게 표제-그것도 베토벤이 붙인 것도 아닌 제목-에 집착하는 연주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지만, 브렌델의 연주는 너무 몽환적인 분위기예요. 특히 템페스트 3악장 같은 건 거의 안개 낀 목초지를 허위허위 걸어가는 느낌마저 줍니다. 열정 소나타는 언제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휘리릭 지나가 버립니다. 모든 곡들이 전체적으로 뚜렷한 느낌을 주지 못하고 겉돌죠. 결국 그 원인은 터치와 해석이 따로 노는 데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나치다 싶은 페달링도 여기에 일조를 했죠.

터치와 해석의 엇갈림, 그리고 음이 뭉개질 정도의 페달링-의도적인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에도 불구하고, 브렌델의 장점은 바로 위에서 말한 단점에서 출발합니다.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연주를 듣는 건지 듣지 않는 건지 알 수 없게 되는, 우리가 항상 숨쉬고 있지만 옆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공기와 같은 느낌이 바로 브렌델 최대의 장점이죠. 게다가 언제나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모습을 보여주다 보니, 브렌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호흡 자체가 대단히 이해하기 쉽고, 거스름이 없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프레이징'이라는 호평을 자주 듣게 됐습니다.

글의 막바지에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저는 사실 브렌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렌델의 피아니즘을 싫어하지요. 들어본 거의 모든 앨범에 호평을 내리지 못했고, 유일하게 좋아하는 레코딩은 브렌델 자신의 원래 모습에서 한참 벗어나 있지요. 브렌델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전에 말한 적이 있는 강요 아닌 강요에서 출발했고, 머리가 좀 커지다 보니 무채색 같은 그의 연주를 별로 좋게 듣지 않게 됐습니다. 듣고 있다 보면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거든요.

하지만 테크닉만이 중시되고, 때로는 메마른 감성이,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하는 감성이 문제가 되는, 힘과 기술만 좋으면 비르투오조라고 찬양받는 현대 클래식 음악계에서, 흑백사진처럼 자연스럽고, 특별히 꾸미려고 하지 않는 브렌델의 연주는 분명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흑백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고, 브렌델을 듣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