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쇼팽 네 개의 스케르초 - 김정원 :: 2007. 2. 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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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스페셜리스트'라는 호칭은 대단히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분명, 어떤 작곡가의 곡을 누구보다도 잘, 그야말로 전문적으로 해석하고 연주할 수 있는 뛰어난 연주자에게 바쳐지는 경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작곡가 이외의 작품은 도무지 훌륭하게 연주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양날의 칼과도 같은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누구누구의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연주자들이 다른 작곡가의 곡에서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 음악에서 가장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행복한(?) 작곡가는 아마도 쇼팽일 것입니다. 그 자신이 이미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렸고, 그의 곡들이 모두 피아니스트라면 꼭 한 번 거쳐야 할 관문으로 간주되고 있는만큼, 피아니스트 중에는 유독 '쇼팽 스페셜리스트'가 많습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스타니슬라프 부닌, 당 타이 손, 그리고 조금 멀리로는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나 에드워드 아우어, 그리고 스페셜리스트라고 하기엔 활동 범위가 조금 넓긴 하지만 아마도 폴란드 태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여겨지는 듯한 크리스티안 치머만 정도가 대강 꼽을 수 있는 쇼팽 스페셜리스트일 겁니다. 사실 'specialist'라는 단어는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천재와 대가'만큼이나 남용되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과연 큰 의미를 두어야 할지는 의문입니다만-심지어는 아직 성장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인 임동민과 임동혁 형제에게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요-, 그래도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연주자들은 신기하게도 다른 곡에서는 죽을 쑤는 경우가 많으니,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 김정원은, 아직 성장하고 있는 연주자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확실히 쇼팽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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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거꾸로 됐습니다만-그리고 갑자기 쌩뚱맞긴 하지만-, 김정원의 이름을 생소하게 느끼실 분들을 위해 김정원의 약력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975년 생인 그는 15세에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의 최연소 수석합격자로 이름을 올립니다. 몇몇 대회에서 우승한 뒤 빈 국립음대를 역시 최우수로 졸업하고는 파리 고등 국립 음악원 최고연주자 과정에 입학합니다. 그 뒤로도 여러 대회에서 입상하며 많은 선배 연주자들의 눈을 사로잡았죠. 그리고 97년에 뵈젠도르퍼 피아노 콩쿠르에서 다시 우승을 거두고, 2000년에는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 도전합니다.

2000년 제 14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대회에서 김정원은 2차에서 탈락했지만, 심사위원이었던 폴란드의 음악평론가 얀 포피스는 '김정원이 우승자'라고 주장하며 위너스 콘서트에 우승자 대신 김정원을 초청할 것을 고집했죠. 결국 김정원은 그를 눈여겨보던 아담 하라셰비치의 도움으로, 95년 우승자 필립 기지아노, 그리고 90년 3위 입상자인 크리스토프 야블론스키와 함께 초청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점은 두 가지 정도 됩니다. 하나는 '김정원이 참 대단한가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평가가 극단적이다'라는 점이지요.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젊은 피아니스트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에 발매된 이 음반에는 메인 타이틀 외에도 '환상곡 f단조(op.49)'와 '뱃노래 F#장조(op.60)'가 담겨 있습니다. 모두 독주곡이고, 그다지 길지 않은 곡들이지만, 한시간 남짓한 이 레코딩에는 김정원이 앞으로 보여줄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직면하게 될 한계 역시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군요.

전체적인 평가를 내리자면, 그의 연주는 그다지 흠잡을 데가 없이 훌륭합니다. 손가락은 전혀 무리 없이 유연하게 돌아가고, 테크닉은 그에 걸맞게 완벽하죠. 강약의 완급조절 역시 훌륭합니다. 음색은 굉장히 깔끔하고 투명하며 꽤 차가운 느낌을 주는데, 이것이 수려한 테크닉과 어울려서 마치 얼음을 다듬어서 만든 조각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 때문인지 무게감은 약간 떨어지는 느낌입니다만-곡 자체가 그렇게 무겁지 않은 탓도 있지만요-, 터치 자체에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나름대로 개성 있는 모습입니다. 특히 펜뚜껑을 잘근잘근 씹는 것 같은 세부 묘사는 높은 점수를 받을만 하군요. 아마 쇼팽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정도의 말만 듣고도 김정원이 어떤 스타일의 연주자인지 판단을 내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정원은 부닌보다는 폴리니에 가까운 피아니스트입니다-'입니다'보다는 '라고 생각 합니다' 쪽이 욕을 덜 먹겠군요-.

예, 이 잘 생긴 청년-유부남입니다-은 굉장히 차갑고 이지적인 터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폴리니나 플레트뇨프의 극단적인 터치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스케르초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음악은 분명히 불보다는 얼음에 가깝습니다. 굉장히 차갑죠. 완벽한 터치에 차가운 음색, 냉철한 해석. 여기에서 우리는 폴리니류의 쇼팽 스페셜리스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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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잠깐만요! 사이비 칼럼니스트의 속단에 섣불리 넘어가진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김정원이 폴리니 같은 피아니스트라는 건 아니거든요. 앞에선 그렇다더니 뭐라는 거냐 하시겠지만, 김정원의 연주는 상당히 이중적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연주는 따뜻함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곡은 차갑고, 어떤 곡은 따뜻하기도 하고, 한 곡에 차가움과 따스함이 같이 녹아들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연주는 단순히 차가운 것이 아니라, '왼손은 따뜻하고 오른손은 차가운' 느낌을 줍니다.

저는 이 점이 바로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성장점이자 한계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 피아니스트가 여러가지 음색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발전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의미입니다. 쇼팽 뿐만 아니라 다른 작곡가의 곡도 잘 소화해낼 수 있겠지요. 더불어 이런 특징이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터치와 결합된다면 굉장한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런 양극적인 특징이 그의 한계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그의 부족한 힘 때문입니다. 터치에 카리스마가 넘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힘과는 다른 개념이죠. 상당히 가벼운 터치에 음색마저 차가운 쪽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김정원은 쇼팽 스페셜리스트로만 남게 될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게다가 따뜻함과 차가움의 합일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김정원은 재능은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재기 넘치는 젊은 연주자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폴리니나 플레트뇨프처럼 레코딩을 할 때마다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쇼팽 콩쿠르에서의 일화가 이미 이를 어느 정도 입증하고 있지요.

여러가지 걱정을 늘어놓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김정원의 연주는 그 나이의 젊은 연주자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테크닉과 완급조절은 흠잡을 데가 없지요. 다만 아직은 젊은 연주자로서의 가능성을 뿜어내고 있는 김정원이 무럭무럭 자라서(?), 한국 예술계에서 또 한 명의 큰 피아니스트가 자리잡기를 바라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두서없이 길기만 한 글을 정리해 보자면, 김정원의 성장방향은 현재로서는 '폴리니형 쇼팽 스페셜리스트'인 듯합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고, 그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은 결국 연주자 자신이 되겠지요. 주로 쇼팽의 레퍼토리에서 좋은 연주를 해온 김정원이, 앞으로 어떤 피아니스트가 될지, 자못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