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 S.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 레이첼 포저 :: 2007. 1. 2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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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원전연주-내지는 고음악-의 발굴과 녹음에 공헌하고 있는 레이블이라면 역시 도이체 그라모폰 산하의 아르히프(Archiv) 레이블과 네덜란드의 채널 클래식스(Channel Classics)를 양대산맥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르히프가 굉장히 넓은 분야, 특히 무지카 안티쿠아 쾰른(Musika Antiqua Koln)을 위시하는 바로크 실내악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면, 채널 클래식스는 주로 독주악기 부문에서 굵직한 스타들을 배출해내고 있습니다. 주로 현악기에 집중하며 잊혀졌던 옛 악기와 음악들을 발굴해내고 있는 채널 클래식스의 사풍(?)은 하이페리온(Hypeion) 레이블의 그것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하이페리온이 피아노에 천착하며 스티븐 허프나 안젤라 휴이트 같은 스타들을 냈다면, 채널 클래식스에는 역시 피터 비스펠베이를 중심으로 미에네케 반 데어 벨덴 같은 현악기 연주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지요.

그리고 채널 클래식스가 배출한 스타들의 목록에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 바로 레이첼 포저입니다. 포저는 불과 30대의 나이에 바흐의 작품을 들고 나타나 당장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지기스발트 쿠이켄을 이을 차세대 바로크 연주자로 낙점받았죠. 하지만 등장하자마자 여러 매체들과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그녀는 어릴 때부터 천재로 칭송받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영재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난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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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포저는 굉장히 순진한 사람입니다. 포저가 쓰는 악기는 18세기 제노아의 장인 페사리니우스의 작품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웬만큼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에게도 생소한 이름일만큼, 페사리니우스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악기입니다. 악기와 제작자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죠. 그 대신 스트라디나 과르네리처럼 유명세를 타지 않아서 개조가 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포저는 이 악기를 스스로가 손을 봐서 쓰는데, '사람들이 마치 아마티-유명한 바로크 바이올린입니다- 소리 같다고 한다'며 좋아합니다. 순진하죠?

유명한 악기는 아니지만 페사리니우스의 음색은 나름의 강한 색채를 띱니다. 약간은 단단하고 뾰족한듯한 느낌을 주고, 표현이 굉장히 강하게 풍겨나는 악기이기 때문에 독주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음량이 굉장히 크고 공명이 좋아서 소리 자체가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이 상당히 신선합니다. 게다가 악기 자체가 지니는 추진력이 상당해서 듣고 있으면 마치 악기에서 음악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 같은 느낌도 줍니다.

포저의 연주는 그 외모나 말씨에서 풍겨나오는 순수함, 혹은 순진함과는 달리 아주 열정적입니다. 따스함과 포근함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쿠이켄의 연주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입니다. 쿠이켄의 연주가 매트와 이불을 두껍게 깔아놓은 침대처럼 느껴진다면, 포저의 연주는 활기에 넘치는 젊은이 내지는 한창 자라날 시기의 풀과 나무를 보는 것 같습니다-아무래도 연배의 영향도 있겠지요-. 표현력이 좋은 악기를 쓰는 사람답게 음 하나하나의 표현에 상당히 민감하고, 그만큼 음악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귀에 잘 와닿을 정도로, 그래서 연주하는 것이 눈에 보일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포저가 지닌 장점은 의외로, 음과 음 사이의 유연함과 균형입니다. 바흐를 연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음의 연결과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인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악보는 쉬운' 바흐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이 강한 악기를 쓰는데다 연주법 자체가 상당히 강인한 편인 포저에게 바흐의 곡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너무 강한 향수를 쓰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포저의 스승이 그에게 '마흔 살이 넘기 전에는 바흐를 녹음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바흐는 어려운 작업이고, 포저에게는 더욱 더 어려운 작업이 되었겠죠. 하지만 악기와 연주 스타일, 그리고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있게 레코딩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연함과 균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음과 음 사이가 유연하다는 것은 한 음을 가지고 많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상의 피아노 협주곡 페이퍼에서 제가 칭찬한 사카리 오라모의 '면적을 지닌' 오케스트레이션이 이와 어느 정도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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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가지고 내는 소리인데 다음 음으로 넘어갈 때 전혀 걸리적거리거나 심지어는 잠시의 끊어짐도 없이, 그야말로 '스르륵'하고 넘어갑니다. 당연히, 뾰족하다 또는 거칠다고 느껴질 수 있는 악기의 표현력은 이 유연함에 녹아들어가서 거부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하나의 장점인 균형은 바이올린 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감각인데, 특히 바흐의 곡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평균율은 잘못 연주하면 초딩이 치는 것 같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감히 바흐의 곡이 초딩 같다니!'라며 분개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피아노 좀 쳐 봐서 평균율이나 인벤션과 파르티타 정도를 연주해 본 분이라면 동감하실 겁니다. 저도 한 때 꽤 열심히 평균율을 연습했지만 웬걸요, 제가 치는 바흐는 정말 초등학생이 치는 바이엘과 다르지 않게 느껴지더군요. 첼로를 배우는 지금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나오면 열심히 연습하지만, 여전히 '초등학생의 바이엘'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포저는 바로 이 부분에서 대단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흐는 나이를 먹어야 잘 연주할 수 있다'는 통념을 어느 정도 불식시켜주는 원숙함이지요. 강렬한 색채를 지닌 악기에 휘둘리지 않고 잘 통제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활달하고 강렬한 연주가 쿠이켄류의 중후하고 부드러운 연주에 익숙한 분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바흐를 이렇게 연주해낸 포저가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첫 번째 녹음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을 두 번째 녹음에서 빚어낸 비스펠베이의 전례가 있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