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 앤드루 리튼 :: 2007. 2. 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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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같은 곡을 연주하는 유럽 출신 연주자와 미국 출신 연주자가 있을 때, 저는 꽤 자주, 편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꼭 편견이라고 자책할 수만도 없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유럽을 비교할 때 그런 생각을 하고, 미국인들조차도 스스로 그런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전통'과 '신흥'의 차이이지요. 그렇다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중의 하나와, 신흥 클래식 강국(?) 미국 출신의 지휘자가 만났다면 어떤 조합이 나왔을까요?

역사가 오래된 유럽 오케스트라들은 대개 자국인, 아니라면 최소한 유럽 출신의 지휘자를 상임 지휘자나 음악감독으로 선임하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럽과 미국의 차이는 확연하니까요. 물론 유럽이라고 해서 한 주먹에 뭉뚱그려서 '늬들은 다 유럽이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유럽의 각 나라들 간의 차이는 유럽 국가와 미국 간의 그것보단 덜 하니, 쉽고 편하게 이등분 해봤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례를 깨고,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이 내정되어 있는 미국인 지휘자가 바로 앤드루 리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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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차이코프스키는 서유럽의 음악양식이 가장 늦게 도입된 지역인 러시아 사람이기 때문에, 역시 도입이 늦었던 미국적인 음악과 잘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역시 독일의 전통적인 음악학을 깊게 익힌 사람이니만큼, 그렇게 쉽게 분석하고 접근할 수만은 없는 사람이지요. 게다가 러시아적인 감성까지 작품의 전반적인 기저에 풍족할 정도로 흐르고 있으니, 당연히 연주하기에 녹록치 않은 작곡가가 바로 차이코프스키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녹음을 거론할 때 언제나 므라빈스키나 게르기예프, 플레트뇨프 같은 러시아 지휘자들이 괜히 앞에 서는 것은 아니지요.

일차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저는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그리고 리튼에 대해 알아보기 전까지는, 리튼이 러시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영국이나 어디 다른 유럽 출신의 지휘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그에게서는 미국인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도회적인 특성이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따라가곤 하는 선율 위주의 오케스트레이션이라든가, 별다른 감정도 들어가지 않은 밋밋한 진행 같은 것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미국인이지만 상당히 유럽화된 지휘자라는 말입니다.

금관악기군을 다루는 그의 솜씨는 이런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리튼의 금관악기들은 꽤나 거친 소리를 냅니다. 러시아 출신의 지휘자들 중 가장 서구화되어 있는 플레트뇨프보다는-개인적으로 플레트뇨프의 강점은 현악 파트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죠- 물론 많이 거칠거칠하고, 가끔씩은 게르기예프의 영감 넘치고 열정적인 연주와 닮은 점도 보입니다. 대개는 현악이 강하고, 현악 파트에 묻혀서 관악군은 잘 들리지 않거나, 아니면 그저 음량만 커서 주체하지도 못하는 관악편성을 보여주는 미국 출신의 많은 지휘자들과는 달리, 다듬지 않은 듯한 소리를 내면서도 능숙하게 조절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의외로 리튼의 단점은 현악 파트에 있습니다. 장점이 뚜렷하게 보이는 금관악기군과는 달리, 현악 파트는 아주 애매한 소리를 냅니다. 리튼의 현악군은 너무 미끄러워요. 좋은 말로 표현하면 '유려한' 연주겠지만, 사실 꽤 묵직하고 거칠거칠한 금관악기군과 비교하자면 그 차이가 심해서 좀 거북할 정돕니다. 고음의 처리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저음부로 가면 갈 수록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들떠서 그냥 말려버리는 느낌이 심해지기도 하지요. 게다가 마치 기름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소리가 미끌미끌거려서, 금관악기군과는 따로 노는 느낌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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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리튼의 연주는 '괜찮은 금관 + 맘에 안 드는 현악'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연주가 전체적으로 들떠 있는 느낌이지요. 이런 단점은 조금 빠르다 싶으면 확연히 드러나는데, 현악 파트의 훈련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공이 달리는 오케스트레이션이 너무 자주 눈에 띕니다. 교향곡 1번의 1악장이라든가, 교향곡 5번 같은 경우엔 소리가 들뜬 것이 자주 느껴집니다-의외로, 가장 어려울 것 같은 교향곡 4번 3악장은 대단히 강력하게 피치를 올리며 잘 지내가더군요-.

확실히 리튼은, 독일이나 여타의 유럽에서 공부한 지휘자들이 보여주는 깊은 맛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음은 뭉개지고 곡의 진행은 급한 데다,  완전히 선율에 치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그 어떤 묵직함도 주지 못하다 보니, 연주 자체가 좀 애매하게 됐습니다. 강렬하게 힘을 주어야 하는 곳에서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깊고 강한 울림을 주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현악과 관악의 괴리는 정말 아쉬울 수밖에요.

결국 리튼의 차이코프스키 전집은 부족한 점이 꽤 보이지만, 그래도 장점 역시 많은 앨범입니다. 특히나 관악과 타악의 사용은 정말 인상적이지요. 이런 부분이 2008년부터 시작되는 리튼의 베르겐 필하모닉 시즌을 기다려지게 만듭니다. 더구나 듣기 어려운 앞의 세 교향곡이 포함되어 있는 꽤 괜찮은 전집을 싸디 싼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매력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여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앨범이 많이 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볼 만한 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