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닐센 교향곡 전곡 -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 2007. 1. 2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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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우리가 북유럽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갖게 되는 환상은 대개 자연에 대한 것들입니다. 만년설에 덮인 채 높다랗게 서서 하늘을 이고 있는 산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흐르는 계곡, 그 계곡을 눈이 시리도록 푸른 색으로 채우고 있는 바닷물, 아름다운 피오르드의 물가에 홀로 서 있는 작고 예쁜, 지붕이 빨간 집, 시원하게 펼쳐진 풀밭에서 뛰노는 동물들, 넓디 넓은 평야 곳곳에 쌓여 있는 짚단들, 어둑어둑하고 깊은 숲... 그리고 닐센은 이 환상들 위에 아름다운 이미지 한 겹을 덧씌워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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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작곡가 카를 닐센(Carl August Nielsen, 1865~1931)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곡가는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구의 작곡가래봐야 그리그나 시벨리우스 정도가 전부이니, 닐센은 유명하지 않다기보다도 오히려 전혀 생소한 작곡가라고 해야겠군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음악은 당연히 레코딩의 수가 적고, 레코딩이 별로 없다면 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오늘 소개할 블롬슈테트와 샌프랜시스코 심포니의 닐센 교향곡 전곡 레코딩은, 마치 도서관에서 언뜻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책과도 같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의 연주는 카라얀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마침 이름도 똑같군요-. 두 사람 모두 오케스트라의 조련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고, 선율미의 구사에 능숙하거든요.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지배하면서 적어도 그 이름값은 최고로 키워놓았고, 블롬슈테트 역시 미국의 오케스트라인 샌프랜시스코 심포니를 꽤 괜찮은 악단으로 만들었습니다. 묵직한 장중함보다는 부드러운 선율에 역점을 둔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블롬슈테트는 카라얀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카라얀의 연주는 어딘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이고, 각 파트 간의 핀트가 서로 맞질 않아서 뾰족하다는 느낌이 자주 듭니다-앞서 소개한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카라얀의 앨범 중에도 칭찬받아 마땅한 레코딩이 꽤 있습니다만 그래도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블롬슈테트는 단순한 선율 구사를 넘어서서 대단히 유기적인 움직임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다보니 오케스트레이션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놀라운 묘사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카라얀과 블롬슈테트의 외양은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근원은 다른 셈입니다-재미있게도 블롬슈테트는 스승인 번스타인과는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닐센의 교향곡 전곡 레코딩에서는 블롬슈테트의 장점들이 거의 극대화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이 곡에서 닐센은 인간의 기질 뿐만 아니라 삶과 사회,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악장 하나하나마다 주제가 명확하고, 거의 확고할 정도의 주제의식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닐센의 교향곡들은 오케스트레이션의 변화가 상당히 잦은 편입니다. 블롬슈테트는 이러한 변화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따라잡습니다. 단순히 테크닉만으로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전체를 하나의 생물처럼 다루면서 음악 자체의 유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지요. 교향곡 2번 '네 개의 기질'과 4번 '불멸'에서는 대단히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오케스트레이션을 정말 놀라울 정도의 솜씨로 빚어내며, 특히 교향곡 4번에서는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내밀한 힘이 아주 강하게 느껴집니다. 금관 파트 해석에서는 명민함이 번득이고, 현악 파트는 엄청난 구현력을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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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전체가 어디 한 군데 튀어나옴이 없이 하나의 체계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각 파트의 밸런스는 상당히 훌륭합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며, 엇나감이 없는 연주이기 때문에 이 레코딩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동세가 느껴집니다. 단순히 밸런스가 좋은 정도를 넘어서서 동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기 때문에, 정적인 느낌이 더욱 더 강조되기도 합니다-정중동 동중정이라 했던가요-. 다만 블롬슈테트의 리딩이 너무 민감하게 변화하다보니 가끔씩은 정신이 없고 어디쯤 온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다른 작곡가들의 곡에 비해 구하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닐센이 덴마크를 대표하는 작곡가인만큼,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사이클에는 수많은 명반들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블롬슈테트의 연주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앨범들도 많기는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블롬슈테트의 해석을 교과서로 여기고 있고, 또 그만큼 그의 연주가 독보적인 것이 사실이지요. 게다가 이 정도로 잘 된 닐센의 교향곡 전곡을 CD 타이틀 단 두 개로, 그것도 2 for 1가격에 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전곡 녹음의 베스트 앨범으로 남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