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닥터 스트레인지러브 :: 2007. 3. 18.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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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라인 서스펜스 코미디.'

맞습니다. 이 영화는 코미디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뭐냐구요? 핵폭탄과 인류 멸망에 대한 겁니다. 또라이 공군 사령관과 마찬가지로 또라이인 합참의장이 나오고, 어리버리한 미국 대통령과 역시 정신나간 소련 당서기장이 나오지요. 인류를 구하기에는 너무 어벙해 보이는 영국 공군 대령도 나오고, 몸이 불편한 천재 과학자도 하나 나오지요.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되냐구요? 코미디니까 소란 한 번 떨고 인류는 결국 살아남지 않겠냐구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이 영화는 골 때리게 웃기-지만 엄청나게 심각한 주제를 담고 있-는 블랙 코미디거든요. 그리고 더더구나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인 이상, 해피엔딩 따위를 바라는 건 꿈 같은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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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릭의 영화에 대해 쓰는 건 어느 분야를 택하든-혹은 그 모두를 종합하든- 어려운 일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등장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식이 얕은 제게는 어려운 일인데다, 이미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이 영화를 해부해 놓은 좋은 글(딴지일보)이 나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음악에 대해서만 쓰겠습니다. 그나마 쉬운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아참, 글을 시작하면서 미리 드리는 말씀인데, 이 글은 가능하면, 제가 링크해 둔 음악을 다 듣고 난 뒤에 아래로 넘어가셨으면 합니다. 별 이유는 없지만, 영화 내용을 녹음해서 올려놓다 보니 호흡이 길어질 것 같아서 말이죠.




B-52 폭격대의 잭 리퍼 사령관에 의해 'R 공격작전(핵무기 폭격 작전입니다)'이 발동되고, 이를 의심한 B-52 폭격기의 승무원들이 기지에 명령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음악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 부르곤 했던 '빙빙 돌아라'가 기억나지 않으시는지요. '손을 잡고 왼쪽으로 빙빙 돌아라~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빙빙 돌아라~' 하는 노래 말입니다. 감이 잘 안 잡히신다면, 한 장면 더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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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꼴통-이긴 하지만 스스로는 대단히 심각하고 확고한 인간-으로 묘사된 잭 리퍼 사령관(이 사람은 실제로 당대의 꼴통이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을 모델로 했다고 하죠)이 B-52 폭격대의 홈베이스인 버펠슨 공군기지를 폐쇄하며 병사들에게 늘어놓는 일장연설과, 'R 공격작전'의 내용을 확인하는 '킹' 콩 소령의 B-52 폭격기 기내 장면입니다. 이제 감을 잡으셨습니까? 혹시 어린 시절에 '빙빙 돌아라'라는 노래를 들어보거나 부르지 않고 자란 분이실지라도, 이 곡조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곡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사나 미국의 초기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어쩌면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음악의 원곡은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이라는 군가입니다. 남북전쟁 시기에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경쾌한 리듬에 활기찬 곡조, '군인의 로망'과도 같은, 훈장과 여자들에 둘러 쌓인 금의환향을 그린 가사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애용되는 행진곡입니다. 영화에서는 B-52가 나오는 장면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소련을 폭격하러 가는 미군 폭격기, 그것도 기내 금고 안에 항상 카우보이 모자를 넣고 다니는, 좀 찌질하고 웃기는 텍사스 출신 사내(콩 소령)가 기장인 폭격기의 배경음악으로 더 없이 잘 어울리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 어딘지 모르게 슬픕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활기차지만 속으로는 우울증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 같달까요? 저도 어릴 때부터 이 노래를 들어왔지만, 머리가 좀 커진 뒤로는 '아니 애들이 듣고 부르는 동요가 왜 이렇게 한 구석이 싸해지게 슬픈 곡조일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단순히 군가라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멜로디 아닌가요? 하지만 곡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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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잊고 살던 중, 얼마 전에 우연한 기회에 이 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빙빙 돌아라'의 원곡이 남북 전쟁 때의 군가라는 사실도 이번에야 알게 됐습니다(그러고 보면 기획에서 서술까지 달랑 반나절이 걸린 이번 포스팅은 상당히 급조된 셈입니다). 학교에서 '19세기사' 수업을 듣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준비해 오신 자료를 보여주시는데 이 노래가 흘러나오더군요. 그런데 익숙하긴 익숙한데, 뭔가 대단히 슬펐습니다. 흔히 알고 있는 그 노래이지만 다른 노래였죠.




With your guns and drums and drums and guns, hurroo, hurroo,
With your guns and drums and drums and guns, hurroo, hurroo,
With your guns and drums and drums and guns,
the enemy nearly slew yeh.
My darling dear, Ye look so queer
Johnny I hardly knew ye. Um-um-um.

Where are your legs that used to run, hurroo, hurroo,
Where are your legs that used to run, hurroo, hurroo,
Where are your legs that used to run,
before you left to carry a gun.
I feel your dancing days are done
Johnny I hardly knew ye. Um-um-um.

Where are your eyes that were so mild, hurroo, hurroo,
Where are your eyes that were so mild, hurroo, hurroo,
Where are your eyes that were so mild,
when my heart you did be beguiled
And why did ye run from me and the child
Johnny I hardly knew ye. Um-um-um.

You haven't an arm, you haven't a leg, hurroo, hurroo,
You haven't an arm, you haven't a leg, hurroo, hurroo,
You haven't an arm, you haven't a leg,
you're an eyeless, boneless, chickenless egg
And ye'll have to be put with a bowl out to beg.
Johnny I hardly knew ye. Um-um-um.

They're rolling out the guns again, hurroo, hurroo,
They're rolling out the guns again, hurroo, hurroo,
They're rolling out the gyns again,
but they never will take back our sons again.
No they never will take back our sons again.
Johnny I'm swearing to ye. Um-um-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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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 한창 영토를 팽창해 나가던 대영제국은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때마침 합병했던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을 수도 없이 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어야 했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영광스러운 훈장과 포상금이 아니라 아내와 어머니의 통곡과 불구로 인한 가난 뿐이었죠. 안 그래도 핍박받던 아일랜드 인들은 이러한 고통을 민요에 담아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쟈니, 당신을 못 알아봤어'라는 이 노래입니다. 가사 내용이 더없이 구슬프지요.

이 노래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군악대장이었던 패트릭 길모어(Patrick Gilmore)가 조성과 박자, 그리고 가사를 바꿔-주인공 이름만 빼고 다 바꿨지요- 군가로 사용하게 된 것이 바로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래가 우리나라에서는 동요로 불리고 있죠.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곡이니, 쾌활한 리듬임에도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큐브릭은 과연 이 노래의 역사를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이 노래를 썼다고 하더라도-물론 선곡이야 음악감독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만, 자기 영화를 여반장해야 성미가 찼던 큐브릭의 성격상 절대로 음악선곡에 무관심하지 않았겠지요- 적절한 선택이었겠지만, 알고 썼다면 이보다 더 적절한 선택이 없었을 테고,  큐브릭은 정말 대단한 천재인 셈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고려해 보면, 큐브릭이 이 노래의 배경을 모르고 썼을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멸망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이 영화에, -어찌보면 냉전시대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제국주의 시대의 비극을 안고 있는 노래를 쓰는 것처럼 탁월한 선택이 또 있을까요.




큐브릭의 다른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는 특징이지만, 이 아저씨는 특정 장면에서는 같은 곡을 변주하거나 각기 다른 악기로 연주해서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습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또 다루게 되겠지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도 그랬고, '배리 린든'에서도 그랬지요.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도 어김없이 이런 습관이 드러나는데, 콩 소령의 B-52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이 노래가 깔리는 것은 물론이고, 핵폭탄을 투하하는 부분에서는 무려 7분 동안이나 이 노래를 변주하죠. 그리고 이 노래의 끝에, 영화사상 가장 충격적인 죽음의 장면으로 꼽힌 콩 소령의 마지막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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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뭐, 다들 아시듯이,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그 장쾌하고 웃기는 선언(맙소사! 내가 걸었어!)을 마지막으로, 큐브릭은 인류의 멸망을 암시하는 핵폭탄의 폭발 장면들을 좍-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마지막까지 장난꾸러기인 것이, 하필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가 베라 린(Vera Lynn)의 'We'll meet again'입니다. 끝까지 관객들을 웃겨주는데, 이 역시도 의미심장합니다. 'I know we'll meet again some sunny day'라...저 sunny day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해석은 우리의 몫이겠지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에 대해서 제대로 글을 쓰려면 -실력도 안 되거니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그 양이 얼마나 될지 생각하기조차 겁이 나서 '음악에 대해서만' 쓰겠다고, 영역을 국한시키고 썼는데도 분량이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 허접한 글솜씨와 더불어, 큐브릭이 음악 선곡에 탁월한 혜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탁월한 블랙 코미디에, 극적인 구성, 역사성 짙은 선곡까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단 한 편만으로도, 천재감독 큐브릭의 이름은 한 세기가 더 지나도 사람들의 기억에 깊게 새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