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 장영주 :: 2007. 3. 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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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은 앨범을 나누는 또다른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연주자의 천재성인데, 이 역시 대략 네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평이한 연주자의 평범한 연주, 천재의 평범한 연주, 평범한 연주자의 뛰어난 연주, 천재의 특별한 연주. 평이한 연주자의 평범한 연주는 대단한 감흥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연주자의 노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젖어들 수 있습니다. 천재가 평범한 연주를 선보였을 때는 약간 아쉽지만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고, 평범한 연주자가 뛰어난 연주를 보여줄 때는 그 노고와 음악가 정신에 찬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재가 특별한 연주를 했을 때, 저의 감상은 대개 이렇습니다. '아!'

 

'아!' 아마도 엊그제 세계 피겨 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 선수가 펼쳐 보인 쇼트 프로그램을 보신 분들이 내질렀을 법한 탄성입니다. 가녀린 여고생이 세계무대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인 충격적인 무대였죠. 마냥 어린 것만 같은 제 이종사촌 동생보다도 어린, 겨우 열 여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그렇게 놀라운 표현력으로 가득찬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영국인 해설자도 '아!'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더군요-. 어떤 분야에서든, 천재에 대한 공통적인 찬사로 이보다 더 정확하고 적합한 표현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리고 제가 장영주의 이 앨범을 처음 들었던 고 1때, 저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운지와 보잉은 그렇다 쳐도, 야성미마저 느껴지는 폭발적인 전개, 그러면서도 어긋남이라고는 없는 완벽한 통제력, 게다가 음표를 머릿속에 내려꽂는 듯한, 그 직설적인 느낌. 사실 겨우 음악 듣기 시작한-게다가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했을 때도 아닌- 고 1짜리가 알아봐야 뭘 알았겠습니까만, 이 앨범에는 분명 장영주의 천재성이 터져나오듯 맺혀있었고, 그 느낌은 지금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악장은 약간 공포스러운 고요함과 함께 시작합니다. 마치 안개에 둘러싸인 묘역에서 들려올 것 같은 선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용히 흐릅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시작되고도 한참동안, 바이올린은 그 주도권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고고한 울림을 만들어 가지요. 이 곡의 분위기는 이미 1악장의 이 첫 부분에서 결정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장영주의 시작은, 제가 떠올렸던 시벨리우스의 이미지 그대로였습니다.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새벽 호숫가 정도랄까요?

 

그 작은 악기로 이렇게 묵직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도 놀랍지만, 탁월한 것은 장영주의 음색만이 아닙니다. 안개 낀 호숫가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의 뒤에 호숫물 찰랑거리는 소리가 빠졌다면, 그 느낌의 전달은 소리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덜할 겁니다. 장영주의 독주는 그 자체로도 뛰어나지만, 얀손스의 뛰어난 뒷받침이 있었기에 더욱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이지 않으면서도 두텁고 무거운 소리와 가늘고 얇은 소리를 오가야 하지만, 얀손스와 베를린 필은 이 역할을 100% 완수해 냅니다. 특히 첼로와 콘트라바쓰들이 만들어내는 낮고 음산한 분위기는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데, 이들의 연주는 정말, 들으면 오싹해질 정도의 포스를 팍팍 뿜어냅니다.

 

그렇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케스트라보다는 독주자의 포스입니다. 1악장의 거의 1/4 정도는 반주 없이 홀로 연주해야 하고, 1/3 정도도 대단히 옅은 반주 속에서 철저하게 혼자서 멜로디를 이끌어 가야 하니까요. 이런 작업은 독주자에게 기술적 완성도 뿐만아니라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곡을 따라가는 데 급급하기 십상이지요. 더구나 이 곡의 균형추가 상당히 많이 변화하다보니, 듣기만 해도 악보와는 상관없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장영주는 그야말로 엄청난 포스를 뿜어내 가며 곡을 '채워갑니다.'

 

포스를 뿜어낸다는 것은 단순히 테크닉이 좋다거나, 감정에 충실하다거나 하는 영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그 뒤에, 혹은 그 위에 있는 영역의 일이지요. 다시 말해 적어도 이 곡에서 장영주의 연주는, 테크닉이나 감정 같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경지에 올라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보잉으로 곡을 채워가고, 곡은 그로 인해 충만해집니다. 악보를 연주한다기보다는 곡 자체를 연주한다는 표현이 더 잘 들어맞겠군요.

 

대단히 낭만적인 선율을 자랑하는 2악장에서도 이들의 호흡은 환상적입니다. 얀손스의 지휘는 저로 하여금, '아니 베를린 필이 언제부터 이렇게 울림이 부드러운 소리를 냈지'하는 생각을 하게 할만큼 새로운 맛을 알게 해주고, 장영주는 그 바탕 위에서 우아한 음색으로, 계속해서 곡을 채워나갑니다. 어쩌면 음악이 울려퍼지는 공간 자체를 채워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악장 역시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 모두에게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번갈아가며 곡을 이끌어야 하되, 바이올린에게 그 책임이 좀 더 많이 돌아가고, 오케스트라는 대체로 선율적이거나 화성적인 면에서 아주 조용히 뒷받침을 하다가도 갑작스럽게 앞으로 나서서 큰 울림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게다가 곡 자체가 녹록하지도 않고-그렇다고 엄청난 난곡은 아니지만-, 어지간해서는 주도권이 뒤바뀔 때 곡이 가벼워지기 쉽기 때문에 좋은 연주를 만들어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이들은 '역시나'입니다. 불꽃이 튀는 듯한 치열한 연주를 들려주는 장영주, 그런 독주자의 음량이 묻히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려하면서도 앞으로 나올 때는 확실하게 나와주는 오케스트라.

 

곡이 연주되는 내내 이렇게 가득 찬 느낌이 없어지지 않아서일까요, 마지막에 터져나오는 박수소리가 전혀 아깝지 않은 느낌입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이 연주는 스튜디오 녹음도 아니고 라이브 녹음입니다. 물론 현대의 녹음기술로 잡음은 다 없애고 어느 정도 음량을 보정했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아니 그런 건 다 상관없이, 라이브 공연에서 이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연주를 해준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나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연주이지만, 처음 들었을 때나 지금 들을 때나, 언제나 '아!' 하는 탄성을 이끌어 내는, 장영주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