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겨울바다 :: 2009. 1. 9. 21:20



겨울 산호초 1: Zeiss Ikon + C Sonnar 50mm - Kodak Portra 160NC / 춘천 고슴도치섬, 2008


용복에서 화암사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꽤 멀었다. 우리는 남해화학 클린오일을 파는 노란색 주유소 앞에서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를 내려 불도 별로 없는 시골길-포장은 잘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시골에 있는 시골길-을 걸었다. 해는 아직 완전히 떨어지진 않아 저편 서녘엔 산너머로 노을이 옷자락을 짙게 펼쳐 두르고 있었고 사방의 산들이 모두 넘어가는 해를 서둘러 숨기려는 듯 등 뒤로 빛을 꾹꾹 눌러담고 있었다.

달도 없는 섣달 초하룻날 밤길을 우리는 불도 없이 그렇게 걸었다. 자락이 꽤 넓은 동네 약도가 예쁘게 그려진 담을 지나 달토끼가 절구를 찧을 것 같은 방앗간을 지나 두엄냄새 나는 논들을 지나 아무 것도 없는 길을 지나 소리만이 있는 산기슭을 지나 조금은 으스스한 버스정류장과 동제를 지낼 것 같은 큰 나무를 지나고 나니 별빛만 나리는 그런 길이 우리를 반겼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만큼이나 많은 별들과 함께 걸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한 해 전 이맘때쯤 당신과 함께 걸었던 마찬가지로 어두웠던 그 길을, 어둠의 초입에서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바람의 궤적을 만들어 주던 하얀 자작나무들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렇게 어두운 곳에서 하늘을 보고 붙박혀 꿈 속에 잠기겠지만 별과 산과 나무들만이 우리를 내려다 보던 어두울녘의 온기와 바닷속 깊은 곳에서 돋아나온 것마냥 하얀 산호초들이 무심히 흔들리는 겨울바다 같았던 겨울밤길은 진흙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옛 무역선의 보물마냥 찬연할 게다.


겨울 산호초 2: Zeiss Ikon + C Sonnar 50mm - Kodak Portra 160NC / 춘천 고슴도치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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