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천재와 대가 :: 2007. 1. 29. 15:37

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에 따르면, 우리의 이름은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물론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줄 압니다만, 프롬의 주장은 의외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개개인의 특징을 나타내주는 수많은 말들을 그 뒤에 숨기고, 철수, 영희, John, Paul, Jane과 같은 이름들은 마치 가면처럼 우리의 얼굴을 장식하기 때문이죠. 시대마다 유행하는 이름들은 어찌보면 프롬이 말한 비인간적인 측면의 표출일지도 모릅니다. 프롬은 이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더 비인간적으로 변한다면, 우리는 모두 숫자로 표기된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 아닌 경고를 남겼죠. 여기에는 쉽게 동의하실 겁니다. 어린 시절 즐겨 보던 SF 만화에서 자주 나오던 소재니까요. 그런데 이미 특정 분야에서는 프롬이 두려워하던 비인간화가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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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음악인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많고도 많습니다. 실력에 따라, 혹은 성향에 따라, 아니면 듣는 사람의 수준이나 취향에 따라 좋은 말을 들을 수도, 나쁜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건 대체로 그 음악인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솔직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솔직하고 다양한 표현들을 뭉개버리는 두 가지의 표현과 자주, 매우 자주 마주치곤 합니다. 다름아닌 '천재'와 '대가'지요. 이 표현들은 속된 말로는 '개나 소나' 다 천재와 대가일 정도로 남용되고 있습니다. 잡지 한 권만 봐도 과장과 남발을 쉽게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천재(天才)[명사] 태어날 때부터 갖춘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사람.

대ː가(大家)[명사] 1.학문이나 기예 등 전문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 거장(巨匠). 대방가(大方家).


이처럼 천재와 대가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만 봐도 적당히 잘 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엇이는 전문적인 수준을 뛰어넘어서 그 방면에 달통한 사람들에게 붙는 어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한테나 붙을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는 거죠. 태어날 때부터 음감이 완벽하게 뛰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대가로 운명지워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천재와 대가(혹은 거장)들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점에서 10분 정도만 잡지를 들고 뒤적여봐도 웬 천재와 거장이 그렇게 많은건지, 이 사람도 천재 저 사람도 거장이죠. 천재나 대가 아닌 사람이 없고, 젊은 연주자 중엔 준비된 거장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천재와 대가들이 많아서, 우리는 이처럼 천재와 대가라는 활자를 눈이 시리도록 많이 봐야하는 걸까요?

사실 천재와 대가들이 많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클래식 음악의 세계는 수백년간 누적되어 왔고, 넓이는 전세계와 거의 동일하니까요. 클래식 음악의 변두리인 대한민국에서도 수많은 아이들이 예술가의 꿈(혹은 부모의 꿈)을 먹고 자라는 것을 보면, 어디에서건 천재나 대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 어느 분야에나 천재는 꼭 보이죠. 당장 여러분의 주변에도 '저 놈 천재끼가 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음악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들리니, 저마다 천재나 대가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도 무수히 많겠죠. 하지만 과연, 모두에게 천재로 인정받고, 누구에게나 대가로 존경받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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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는 유망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물론 유망주는 어느 분야에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야구판에서는 이 단어만큼 잔인한 말도 없지요. 팀의 기대를 한껏 받다가도,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기대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는듯 퇴출당하는 선수들, 이들이 바로 야구 유망주들입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는 한 해에만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유망주들이 사라져버리곤 하죠. Baseball America라는 잡지에서는 해마다 100명의 유망주를 선정하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그냥 사라져버립니다. LA 다저스의 최희섭 선수도 그런 케이스죠.

뜬금없이 야구 얘기를 꺼낸 것은, 음악의 세계 역시 야구장의 차가운 현실만큼이나 한 개인이 성장하기 어려운 토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일천한 경험을 잣대삼아 모든 경우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입니다만, 분명히 음악은 천재성과 함께 엄청난 연습을 필요로 하는 분야입니다. 야구와 비슷하죠.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엄청난 육체적 연습과 함께 고도의 정신력이 없다면 언제 사라져버릴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야구와 음악의 공통점일 것입니다.

요는, 우리가 잡지에서 흔히 대하는 '천재'들이나 '준비된 거장'들은, 대부분은 그냥 '유망주'일 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유망주들도 다들 천재이긴 합니다만, 자신의 천재성을 꽃피우지 못하거나, 혹은 천재가 아니라 그냥 웬만큼 실력있는 연주자일 뿐이지요. 많은 유망주들은 자신을 천재라고, 준비된 대가라고 띄워주는 음악매체들의 호평에 우쭐하다가는,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야구와 음악의 두번째 공통점은 바로 언론이 망치는 유망주가 많다는 점이겠군요.

결국 아무리 타고난 천재성을 지녔다고 해도, 백날을 언론에서 준비된 대가라고 칭찬을 해도,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음악의 유망주들은 결코 대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장영주는 분명 천재이지만, 멘델스존과 시벨리우스의 협주곡 이후로는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지요. 임동혁 역시 세계 언론으로부터 천재라는 격찬을 듣고는 있습니다만, 자신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언제 잊혀질지 모릅니다.

한 연주자에 대한 생명력 있는 평가를 접어버리고 그저 '천재'와 '대가'로만 모든 것을 표현하려는 현대 음악계에, 어느 바이올리니스트의 일갈은 촌철살인의 경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가 천재라니! 나는 20년 동안 하루에 열네 시간씩 연습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