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 린 하렐 :: 2007. 1. 2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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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최근으로 올 수록 첼리스트들은 좀 더 큰 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소리를 넘어서 상당히 '거대한' 느낌을 주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음량이나, 괴력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자클린 뒤 프레가 가장 좋은 예가 되겠군요. 이들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근자의 첼리스트들은 대체로 꽤 큰 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원래 큰 소리를 내는 악기이기는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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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하렐은 이러한 경향과는 반대로 상당히 작은 소리를 냅니다. 어쩌면 그것은 340년이나 된 그의 167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비슷한 연대의 바락 노만(1710년)을 쓰는 비스펠베이도 스틸현을 사용할 때는 굉장히 힘겨운 소리를 내거든요. 하지만 하렐의 음량은, 그리 큰 소리를 내는 연주자가 아닌 장한나(1757년산 과다니니)보다도 작고, 역시 큰 소리와는 거리가 좀 있는 요요 마(1712년산 다비도프 스트라디바리우스/1733년산 몬타냐나)보다도 역시 작고, 요요 마에게 다비도프를 물려주었다는 뒤 프레보다는 당연히 작으며, 심지어는 힘겨운 소리를 내는 비스펠베이보다도 작습니다. 그런만큼, 하렐의 음량은 단순히 악기의 연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연주 스타일 자체가 작은 음량을 낸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군요.

잘 돌출되지 않는 저음부를 연주하며, 큰 소리를 내야하는 악기를 연주하는데 음량이 작다는 것은 어찌보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더구나 오케스트라에서의 단원이 아니고 주로 솔로로 많은 연주를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큰 약점이 되겠지요. 이 앨범에서도 드러나는, 너무 작지 않은가 싶을 정도의, 심지어 가끔씩은 잘 안 들린다 싶을 정도의 작은 음량은, 확실히 하렐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주를 맡은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그렇게 큰 소리를 내는 피아니스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렐의 소리는 가끔씩 그 뒤로 밀려나 버리거나 숨어드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하렐의 협주곡 연주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드보르작이나 엘가의 협주곡을 연주한다고 생각해보면, 조금 난감할 것 같군요.

하지만 그의 작은 소리가 분명히 약점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렐의 연주를 칭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역시 안정되고 차분한 그의 해석 때문일 것입니다. 하렐의 스타일은 화려하거나 기교적으로 아주 어려운 곡에는 잘 어울리지 않겠지만,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같이 커다란 음량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기교보다는 음의 깊이와 전개의 안정감이 더 중요한 곡에는 맞춤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터질 듯한 힘도 없고, 압도적인 소리도 없지만,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전개와 해석, 크지는 않지만 깊이있는 울림, 그리고 단순히 한 면으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품위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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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렐의 연주는 그래서,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와 닮은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품격하면 일단은 누구든지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가야 하는 푸르니에의 연주에서 약간 힘을 빼고 기름칠을 한다면 하렐의 연주가 될 것 같군요. 하렐의 연주는 특히 저음부의 울림이 큰 푸르니에의 특징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죠. 저음부 연주만 놓고 본다면 어느 누구의 연주와 비교해봐도 굉장히 좋은 연주입니다(소리가 작아서 아쉽긴 합니다).

하렐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바로 세밀한 표현력입니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에서는 굉장히 작고 세밀하게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자주 나오는데, 한 호흡에 그냥 뭉뚱그리며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을, 하렐은 대단히 작고 예쁘게, 그리고 섬세하게 하나하나 다 표현해가며 나아갑니다. 하렐의 스타일과 좋은 짝을 이루는 아슈케나지의 낭만적인 반주가 이러한 부분을 더 돋보이게 하는군요.

음량 말고도 아쉬운 점 하나를 더 들자면, 가끔씩 힘에 겨운 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음부로 갈 수록 이런 소리가 자주 나는데, 빠른 부분을 지나갈 때는 확실히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그냥 고음 그 자체를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렐의 저음부 연주가 워낙 좋다보니 그 정도는 그냥 눈감아 주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렐의 연주는 어떤 무형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분명 그의 연주는 동시대의 다른 첼리스트들에 비해 크게 주목받는 것은 아니지요. 마치 조용한 글보다는 힘이 넘치는 글이 먼저 주목 받듯이, 하렐 역시 그 작고 조용한 연주 스타일 때문에 그다지 많이 거론되는 연주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렐의 연주가 지니는 가치는 단순히 작은 음량이라든가, 몇 가지 소소한 그의 단점을 떠나서, 우리에게 '주류'로 각인된 연주와는 다른 방향의 음악을 들려준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 세상은 그를 따뜻하고 푸근한 음악을 들려주던 인상 좋은 할아버지로 기억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