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 - 스티븐 코바셰비치 :: 2007. 4. 16.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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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 3악장

 


'기준이 된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것과 그보다 못한 것 사이에 있다는, 다시 말해 적당한 퀄리티를 갖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것 중에서도 아주 좋아서 다른 것에 모범이 될 만한 품질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의 '스탠다드'로 일컬어지곤 하는 이 앨범은 중간의 뜻보다는 '아주 좋다'는 뜻에서 기준점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사실 피아니스트로서의 스티븐 코바셰비치의 위치는 아주 좋은 스탠다드보다는 적당한 스탠다드 쪽입니다-물론 기량이 뛰어나고 유명한 사람들과 견주었을 때 말입니다. 전체 연주자들을 놓고 봤을 때야 아주 위쪽에 있는 사람이겠지요-. 요즘 나오는 슈퍼 피아니스트들처럼 괴물같은 테크닉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감성적인 면에서도 아주 뛰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길렐스나 박하우스처럼 말로 다 못할 감동을 확- 안겨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코바셰비치는 '적당한 테크닉과 적당한 감성으로 적당한 감동을 안겨주는 적당한 피아니스트'로 여겨질 법도 합니다. 실제로 무시 못할만큼 많은 앨범에서 그런 면을 보여주기도 했고요.

 

하지만 코바셰비치는 의외로 '적당한 피아니스트'에서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꼽히고 있고-저는 반쯤은 동의하고 반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몇몇 앨범은 명연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어중간한' 연주자로 취급될 수도 있는 코바셰비치가, 이처럼 좋은 연주자로 대접받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앨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코바셰비치의 연주는 대단히 안정적입니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리듬이 워낙 빠르고 꽤 큰 변화가 있는 곡이기 때문에 중심을 잃고 허둥대기 쉬운 곡이고, 특히나 혈기왕성한 젊은 연주자(이 앨범은 코바셰비치가 31세 때 녹음한 연주입니다)들은 불꽃 튀는 타건의 와중에 엇나갈 가능성도 높지요. 하지만 코바셰비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만의 템포를 정확하게 유지해 나갑니다. 비록 아주 강력한 타건은 아니지만, 요소요소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그의 터치는 아주 효과적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확하고 균형잡힌 코바셰비치의 연주가 가장 빛나는 것은 기교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은 곡을 연주할 때입니다. 코바셰비치가 정도 이상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곡에서는 눈에 확 띄는 미스터치를 내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까요. 심지어 규모와 구조 면에서는 대곡이지만 테크닉 면에서는 엄청난 난곡이라 할 수 없는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도 그는 숨어있는 것도 아닌 절정 부분에서 아주 강렬한 미스터치를 냅니다. 그래서 제 기억에서 그 앨범은, 다른 부분의 연주는 대체로 훌륭했지만, 이 부분에서 완전히 산통을 깨버린 것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이 앨범에 수록된 두 곡, 그리그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대단한 난곡은 아닙니다-물론 저더러 쳐보라고 한다면 맞아죽어도 못하겠지요-. 그 덕에 코바셰비치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균형잡히고 안정적인 자신의 연주를 보여줄 수 있었지요. 1악장부터 3악장까지, 상당히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면서도, 그의 연주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철같은 타건 없이도(물론 꽤 강하긴 하지만), 화려한 기교 없이도, 넘쳐나는 감성 없이도 또박또박 밟아나가는 연주가 아름다워질 수 있었습니다.

 

독주자가 정확하고 안정된 연주를 하기 위해 항상 요구되는 것이 바로 오케스트라의 탄탄한 반주인데-전에 소개한 에밀 길렐스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에서 이미 오케스트라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었지요-, 콜린 데이비스는 이 점에 있어서 아주 좋은 지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리딩은 독주자에게 넓은 마당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인지 좀 맥이 빠진 것 같고 무미무취한 면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다이내믹한 흐름을 보여주면서도 탄탄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데이비스가 충분히 분위기를 날리면서도(?) 견고한 바탕을 만들어 준 덕에, 코바셰비치는 자신의 '적당한' 타건으로도 지나치지도 못하지도 않은 딱 좋은 정도의 연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거죠.

 

대단히 안정된 오케스트라와 균형잡힌 독주자의 호흡으로, 이 앨범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에 있어 스탠다드가 될 수 있었습니다-슈만 협주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칫하면 어중간한 연주자의 어중간한 연주로 끝날 뻔 했겠지만, 이들의 연주는 나름의 활동성과 튼실한 기반 위에서의 다이내믹을 품고 있어서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는 점이, 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주는 것 같군요.

 

한때나마 꽤 좋아했던 코바셰비치도 어느새 환갑을 넘어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열정적으로 녹음했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이 나온지도 어느덧 2년이 넘었고, 젊디 젊던 시절 녹음한 이 음반이 나온지도 30년이 더 됐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코바셰비치는 열심히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마치 그가 36년 전 그리그를 녹음할 때 그랬던 것처럼, 엄청난 포스는 없지만, 더도 덜도 아닌 딱 적당한 정도로. 저 역시 여전히 그의 음반을 좋아합니다. 이 앨범에는 피가 끓는 열정은 없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또 다른 감동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