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생상 피아노 협주곡 전집 - 스티븐 허프 :: 2007. 1. 2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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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음악을 연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아마도 '얼마나 감정을 잘 전달하느냐'일 것입니다. 감정이 없다면 그건 음악이 아니고 그냥 음표의 나열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리고 감정에는 연주자마다의 서로 다른 독특한 특성이 배어나오기 때문에, 음악에 있어서 감정의 전달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감정의 전달과 함께 반드시 갖춰야 할 것으로 언제나 테크닉을 거론합니다. 테크닉이 부족하다면 아무리 감정이 뛰어나다 해도, 그것은 그저 감정에만 치우쳐서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저는 기본적인 테크닉은 있어야 감정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음반을 평하는 제 글을 보면 터치의 느낌과 동시에 테크닉을 평가하는 내용이 유난히 많습니다. 감정과 테크닉, 두 요소는 음악을 연주함에 있어 전문 연주자라면 필수적으로 모두 지녀야 할 미덕일 겁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테크닉은 별로인데 감정에만 잔뜩 취해서 흐늘거리거나, 아예 무미건조하게 손가락만 잘 돌아가는 연주자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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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허프는 대단히 모험심이 강한 연주자입니다. 그가 내놓는 레코딩들을 보면 모두 기교적으로 상당히 어렵고-전문 연주자에게도 어렵다는 말이죠-, 우리가 흔히 듣는 명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들을 연주한 것이 많습니다. 아니, 사실 하이페리온 레이블에서 음반을 녹음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모험가라고 봐도 좋겠군요.

생상의 피아노 협주곡은 대단한 난곡입니다. 악장 하나하나가 피아니스트에게 섬세한 움직임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주를 요구하죠. 그래서인지 이 곡들을 녹음한 연주자는 그다지 많지 않고, 콘서트에서도 이 곡들을 연주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웬만큼 뛰어난 테크닉을 가지고는 제대로 연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많은 난곡과 마찬가지로 이 곡을 연주하는 것 역시 하나의 모험일 것입니다.

허프가 이러한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그에게 완벽한 테크닉과 정확한 음악적 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테크니션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이 아저씨는 악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한 곡들을 참 잘도 풀어가거든요.

우선 테크닉을 살펴 보자면, 그의 손가락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CD를 듣다 보면 이거 혹시 미디로 연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테크닉을 선사합니다. 특히 협주곡 2번의 3악장처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부분에서도 전혀 곡에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듣고 있는 지금도 살짝 소름이 끼치는군요. 테크닉은 더 말할 필요가 없으니 넘어가렵니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들이 마치 나무토막 같은 연주를 들려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이점인 기술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적인 면이 떨어지게 되는거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도 아닙니다. 조용히 흘러가다가 갑작스럽게 굉음과 함께 떨어지는 폭포수가 되고, 다시 어느새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허프의 연주는 자연스럽습니다. 감정선이 끊긴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다는 말이죠.

더 놀라운 것은 허프의 연주가 아주아주 단정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뛰어난 감성을 갖춘 피아니스트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가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는 것이지요. 자꾸만 랑랑을 언급하게 되는데, 그의 연주는 물론 뛰어나지만 들을 때마다 감정이 지나치게 넘쳐흐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허프는 이렇게 넘쳐 흐르는 연주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의 연주는 마치 잔에 알맞게 담긴 색 좋은 와인이나, 커피잔에 아주 적당히 따라진 향내 좋은 커피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음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짚으면서도 감정에 충실하고, 동시에 오버되지 않도록 절제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놀라울 뿐입니다. 다른 피아니스트와 비교하자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는 리처드 구드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할까요. 협주곡 4번 2악장의 중반부에 나오는 단아한 주제는 정말이지...(말로 표현을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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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가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양손의 밸런스입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아마 왼손과 오른손의 병행 현상일텐데요, 병행은 정말 벗어나기도 힘든 데다 해결도 어려워서, 엄청난 연습을 통해서 고쳐야 하는데, 그렇다 해도 사람의 몸은 좌우의 밸런스가 다르기 때문에 왼쪽과 오른쪽이 미세한 차이를 보이곤 합니다. 좋은 피아니스트들의 레코딩에서도 가끔씩은 왼손과 오른손의 박자가 살짝 엉키는 부분이 있죠. 하지만 허프의 연주를 들어보면 이 사람은 마치 왼손과 오른손을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완벽한 밸런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양손의 밸런스가 좋은 것이 비단 완벽한 박자감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에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도 오른손을 위주로 치게 되고, 또 거의 대부분의 곡들이 오른손 파트에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상의 피아노 협주곡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곡들에 비해서는 주제가 오른손에 편중된 비중이 적은 편입니다. 따라서 이 곡을 연주하는 사람은 왼손 역시 오른손만큼 잘 돌아가야 하는데, 허프는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라도 하듯이 모범적인 연주를 들려줍니다. 때로는 오른손의 반주 역할을, 때로는 전면에 나서서 오른손과 함께 주제를 연주하기도 하면서, 허프의 왼손은 대단히 기능적으로 움직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항상 장점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같은 레이블의 같은 시리즈로 출시된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왼손이 너무 앞으로 나서 있기도 합니다.

이 음반이 명반이 될 수 있는 공로는 물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도 돌아가야 합니다. 시티 오브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전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안스네스/래틀)에서는 저에게 욕을 좀 먹었습니다만, 이 음반에서만큼은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이먼 래틀이 떠난 뒤로 CBSO의 음악감독을 맡게 된 핀란드 출신의 지휘가 사카리 오라모는 뭐랄까요, 면적을 지닌 음악을 들려줍니다. 이 사람의 연주는 단순히 음과 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파트마다 각각의 면적을 확실하게 지니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페이퍼 1호에 있는 칸딘스키의 그림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허프의 독주와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레이션의 변화에 대단히 잘 적응하면서도 넘치지 않는 단아함을 지니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또 터뜨려 줄 때는 확실히 터뜨려 줍니다.

스티븐 허프는 이 음반 하나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이 레코딩에 이어 구입한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들도 저를 열광시켰지요. 테크닉적으로 완벽하면서도 절제된 감정선의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아마도 꽤 오랫동안 저를 매혹시키며 저에게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로 남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