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 유리 바쉬메트 :: 2007. 2. 13.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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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3형제 중 둘째는 항상 애매한 위치입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중간이라 딱 좋을 것 같지만, 형제 간의 권위나 책임감 면에서는 언제나 맏이에게 밀리고, 부모님께 귀여움을 받는 데는 항상 막내에게 밀릴 수밖에 없죠. 그래서인지 형제 중 둘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자기 몫은 확실하게 챙긴다'거나 '손해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는 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둘째는 첫째보다는 대접도 못 받고, 막내보다는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좀 불쌍한 자리인 게 사실인 듯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현악기 형제들 중에서도 둘째는 눈에 띄지도 않고 저변도 굉장히 좁은, 측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기분좋은 중저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첼로나 비올라에게 밀리는 것을 보면 불쌍할 수밖에요. 일단 비올라를 위한 곡 자체가 바이올린이나 첼로에 비해 굉장히 적은 것부터 시작해서, 전공자는 그렇다치고, 취미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 중에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도, 비올라를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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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시대에 와서, 이 아름다운 악기는 몇몇 뛰어난 연주자에 의해 이전보다-는 그래도- 한 단계 격상된 위상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노부코 이마이, 킴 카쉬카쉬안, 타비아 짐머만처럼 활발한 활동과 수준 높은 연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몇몇 연주자들 누구보다도 확고한 업적과 명성을 쌓아올린, 최고의 비올리스트로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추켜 세우는 사람이 바로 유리 바쉬메트입니다.

이미 23세 때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비올라 유일의 비르투오조', '아름다움의 구현자'와 같은 영예를 얻고 있는 바쉬메트가 비올라를 시작한 동기는 약간 황당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바이올린으로 10대 때 음악을 시작한 그는, 비틀즈에게 빠져 들어 팝 밴드 활동을 하느라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 때 친구가 '비올라는 곡목이 적어서 바이올린보다 적게 연습해도 될 것'이라며 비올라를 배울 것을 권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 최고의 비올리스트가 배출된 첫걸음이었으니, 비틀즈에게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앨범을 들으신다면, 이제는 정말로 비틀즈에게 감사하실 차례일 겁니다. 연주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따스하며, 훌륭합니다. 깔끔하다고 해서 몇몇 젊은 연주자들에게서 보이는 차갑고 도회적인, 직선적인 깔끔함이 아니라, 자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둥글둥글한 곡선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바쉬메트는 비올라 특유의 중저음을 최대한 발휘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게, 그리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마치 공간을 감싸는 듯한 느낌으로, 살짝 따뜻하고 기분좋은 내음이 나는 공기(air) 같은 분위기(air)를 만들어 내는군요.

반주를 맡은 미하일 문티안의 피아노는 사실, 약간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반주자의 역할은 대개 너무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적당히 독주악기를 보좌하는 정도로 한정되기 마련인데, 문티안은 이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면서 자기 소리를 굉장히 크게 냅니다. 아마 지금까지 들어본 현악 소나타 중에 가장 커다란 반주음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죠. 그렇지만 문티안의 반주음량이 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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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브람스는 독주악기와 반주악기 간의 대화 혹은 대결 구도로 짜여진 곡을 많이 썼습니다. 이전에도 소개했던 바이올린 소나타가 그렇고, 얼마 전에 소개한 피아노 협주곡 역시 마찬가지이며, 바이올린 협주곡도 그런 성격을 드러내죠. 이런 모습은 비올라 소나타에서도 꽤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비올라의 소리가 바이올린보다 날카롭지는 않지만 좀 더 묵직하게 울려퍼지는만큼, 반주가 작으면 비올라 소리에 묻힐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사실, 브람스의 소나타나 협주곡을 반주하는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소리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반주할 때보다 더 크게 느껴지곤 합니다. 굉장히 치열한 곡들이지요.

바쉬메트와 문티안은 그러한 브람스의 특징을 아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소나타 1번의 1악장 말미와 4악장, 2번의 2악장과 3악장은 브람스 소나타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앨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결과 대화는 치열하지만 결코 과열되지 않으며, 언제나 부드럽게 마무리됩니다. 게다가 완숙한 경지에 들어선 완급조절 능력이라든가, 악기를 자기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연스러움은 연주의 가치를 더욱 더 높여줍니다. 마치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다!'라고 외치며 온몸으로 비올라의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듯하죠.

다른 많은 브람스의 곡들과 마찬가지로, 비올라 소나타 역시 충분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즐기기에 좋은 곡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적절한 완급조절과, 긴장감을 극대화시켜주는 녹록치 않은 반주자와,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을 구축할 줄 아는 연주자와 합쳐진다면, 최상의 조합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제 손에 들려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은 제게 비올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현악기에 비해서 비올라에는 관심이 덜 가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인데-물론 콘트라베이스는 제외하고 말이죠-, 바쉬메트의 연주는 저를 홀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비올라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고 싶으시다면, 이 연주를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다만, 이 앨범을 듣고나서 저처럼 바쉬메트에게 홀려서 이 앨범 저 앨범 사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