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브이 포 벤데타 :: 2007. 2. 13. 22:27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대한 것입니다. 단순히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주인공의 심경을 드러내기도 하며, 때로는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기도 하지요. 음악이 없는 영화를 상상해 보세요. 10점짜리 영화의 별점이 7점으로 깎여나갈 것 같지 않습니까? 음악이 없는 영화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분장이 없는 영화, 의상이 없는 영화, 표정이 없는 영화와 동의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영화감독들과 음악감독들은 영화에 쓸 음악 선정에 골머리를 앓곤 하지요. 수많은 자료를 찾고 또 찾아서 적당한 곡을 찾기도 하고, 그것이 어려울 경우엔 새로운 곡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명곡들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존의 명곡들이 새로운 자리에 놓여 자신의 존재가치를 힘주어 말하곤 하지요.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작곡가들이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명곡들을 남겨놓은 클래식 음악이 영화음악에 많이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만큼 자료가 방대하니까 말이죠.

 

자신의 작품에서 클래식 음악을 가장 잘 이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한 감독은 아마도 스탠리 큐브릭일 겁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흘러나오는 리게티의 음악이 주는 공포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물론 슈트라우스도 그렇고, '배리 린든'에서 쓰인 헨델과 슈베르트 역시 잊을 수 없는 배경 음악이지요. 그리고 저는, 물론 아직 큐브릭만큼 잘 쓴 건지는 모르겠고, 역시 아직은 큐브릭만큼 많이 쓰지도 않았지만, 클래식 음악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배치한 감독을 하나 더 찾았습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갑작스레 등장하는 가이 포크스 마스크만큼이나 쌩뚱맞은 이 감독은 바로 제임스 맥테이그입니다. 알려진 대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인물이지만, 별로 들어본 적은 없으실 겁니다. 저도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인 줄 알았거든요. 아니나다를까, 워쇼스키 형제는 영화의 각색과 제작에 참여했으니, 맥테이그는 그들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을테고, 안 그래도 영화에는 이 작품이 워쇼스키 형제의 손아귀에서 이루어진 듯한 흔적이 아주 짙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매트릭스 시리즈의 경량화 버전으로 취급받으며 매트릭스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지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사실상 워쇼스키 형제의 손을 거친 작품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매트릭스에서 꽤 괜찮은 선곡 실력을 보였던 그들을 돌아본다면, 이 '기가 막힌 타이밍'은 그다지 쌩뚱맞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제가 무슨 곡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감을 잡으셨을 겁니다. 바로 영화 앞부분의 폭파 장면과 맨 마지막 장면의 의사당 폭파 장면에 배경으로 사용된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지요.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지닌 이 곡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약 2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나폴레옹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렸고, 러시아는 이를 어기며 영국과의 교역을 유지했지요. 자신의 명령을 어긴 러시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던 나폴레옹은 1812년 6월, 러시아를 침공합니다. 군사적 천재인 나폴레옹 앞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데다 뛰어난 지휘관마저 없었던 러시아 군은 속수무책으로 패배를 거듭했죠.

 

하지만 러시아의 신임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싸우기보다는 점점 더 물러서며 전투를 피했고, 계속해서 병력을 모아 마침내 1812년 9월, 모스크바 서쪽의 보로디노에서 대반격을 시도합니다. 양군은 도합 10만의 사망자를 내는 격전을 치뤘고,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포기하고 모스크바를 내주며 퇴각하죠. 이 전투와 모스크바 함락은 오드리 헵번 주연의 '전쟁과 평화'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쿠투조프의 퇴각으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손에 넣었지만, 겨울이 일찍 오는 러시아의 특성을 잘 몰랐던 프랑스군은 혹한기 장비를 전혀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추위를 맞게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점령 한 달만인 1812년 10월 서쪽으로의 긴 퇴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때만을 기다려온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을 추격하여 공격했고, 나폴레옹은 결국 러시아 원정에서 전체 병사의 90%인 55만 병력을 잃고 말았지요. 그리고 이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1880년, 차이코프스키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곡이 바로 '1812년 서곡'입니다. 이 곡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인데, 우선 처음은 성가 '신이 너의 백성을 보호하신다'의 선율로 시작하여 역시 성가의 선율로 나폴레옹의 침공에 분노하는 러시아를 나타내지요. 러시아군이 집결되며 제 2 주제가 시작되지만 곧 프랑스의 상징과도 같은 제 3 주제 '라 마르세예즈'의 선율이 조금씩 강해집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러시아 민중의 의지는 민요에서 따온 제 4 주제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결국 추위와 러시아군이 프랑스군을 몰아치고, 최후까지 버티던 '라 마르세예즈'는 대포 소리와 함께 다시 강력해진 제 2 주제에 완전히 파묻히고, 엄숙하게 연주되는 러시아의 국가와, 동시에 교회에서는 승리의 종소리가 어지럽게 울려퍼집니다. 강력한 적에게 침략당했지만 그것을 저지하고 지켜낸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감독이 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두번씩이나 1812년 서곡의 제 2 주제를 배치한 까닭은 명확해집니다. 바로 '부당한 것에 대한 저항과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행진곡풍의 경쾌하면서도 뜨겁게 끓어오르는 제 2 주제는 이 영화의 주제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선택이었습니다. 게다가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은 곡의 제목을 말해주기까지 하며 감독의 의도를 아예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지요. 잉글랜드의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런 것이 없으니 아쉬운대로 1812년 서곡은 최고의 선택인 것입니다.

 

더구나 감독-어쩌면 제작자'들'-은 이 곡을 어떻게 써야할 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1812년 서곡이 쓰인 부분은 정확하게 폭탄이 터지는 타이밍인데, 이 곡에는 큰 북으로 대포 효과를 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포 소리가 나야 하는 부분에서 폭탄이 터진다, 선곡도 선곡이지만 그 센스가 정말 빛나지 않습니까? 더구나 초연 때 실제로 대포를 사용했었고, 최근에도 이벤트성 연주회에서는 실제로 대포소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1812년 서곡과 의사당 폭파 장면은 정말 찰떡 궁합인 셈이지요.

 

결국 1812년 서곡은 수미상관적인 구조-아, 그리운 언어영역이여-를 이루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나타내는 음악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더구나 모든 잉글랜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유치하지만 어찌보면 가슴이 턱 막히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행진곡풍의 웅장한 사운드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배경이지요.

 

중학생 때 조지 오웰의 '1984'를 책장이 닳도록 여러번 읽고 또 읽은지라 이 영화의 줄거리 자체는 크게 놀라울 것이 없었지만,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센스 만점의 1812년 서곡은 저로 하여금 이 영화를 굉장히 즐거운 작품으로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참, 물론 가이 포크스 마스크 때문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