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2007. 2. 1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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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느냐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는가하는 것이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누군가를 평가할 때 대개 사후에 사람들이 그에게 보낸 시선을 더 많이 믿곤 합니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유명인에서부터 평범하게 살다 간 사람에 이르기까지, 살아있을 때와 죽은 뒤의 평가가 전혀 달라지는 사람도 수두룩하죠. 역시 언제나 좋은 면으로 기억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살아 있을 때나 죽고 난 다음이나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마지막 낭만주의자'와 같은, 존경이 듬뿍 담긴 호칭을 달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사망한지 벌써 17년이 지났고, 그의 음반들은 이제 리마스터링을 거친다해도 대부분이 상당히 거칠고 완벽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음반들로 인정받고 있으며, 수많은 후배들이 수많은 명반을 내놓았지만 아직도 그의 라흐마니노프는 불멸의 명반으로 추앙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유진 오먼디와 함께 한 이 음반 역시 최고의 해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거의 30여년이 흐른데다 74세의 고령에 연주한 레코딩인데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저런 뒷말들이 많은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최고의 연주라고는 하지만 이 앨범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하면서 호로비츠의 조율사였던 프란츠 모어(Franz Mohr)를 빼놓는 건 말도 안 되겠죠.

 

1964년부터 호로비츠의 피아노를 조율했던 모어를 두고, 사람들은 그가 아니면 호로비츠의 신화는 불가능했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호로비츠의 까다롭기 그지없는 요구를 잘 수용할 수 있었던 뛰어난 기술자가 있었기에 뛰어난 연주가 가능했다는 뜻이지요.

 

모어는 25년간 호로비츠의 조율을 책임지면서 까다로운 완벽주의자였던 호로비츠의 성깔(?)을 잘 받아 넘겼는데, 문제가 생긴 것은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한 1978년 카네기홀 연주회에서였습니다. 호로비츠는 워낙 과시욕이 강한 성격이었고, 그러다보니 자신의 피아노가 오케스트라보다 두드러지는 소리를 내기를 원했죠. 그래도 평소엔 그렇게 요구가 과도하지 않았던 호로비츠인데, 그 날은 웬일인지 소리에 집착하며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겁니다. 결국 모어는 해머에 래커칠을 해가면서까지 소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피아노 플랫폼을 따로 만들기까지 했지요.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해머가 엉망이 됐으니 소리는 거칠다못해 흐리멍텅해졌고, 피아노가 플랫폼 위에 올라앉았으니 소리가 떠 버리기까지 했죠. 더 치명적인 것은 녹음 상태마저 엉망이었다는 겁니다. 모어는 이 연주가 음반으로 출시되었을 때 '너무 창피해서 어쩔 줄 몰랐고 10분도 채 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상했지요. 자기가 조율한 피아노가 그렇게 흐릿한 소리를 냈으니 그럴 수밖에요-원래 호로비츠가 약간 콧소리가 나는 음향을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말이죠-. 그래놓고 다음 연주회 때 같은 피아노를 다시 조율해 놓으니까, 호로비츠는 자기가 찾던 이상적인 소리라고 좋아했답니다. 까다로운 데다 변덕마저 심한 노인네-74세였으니-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온 앨범이 바로 이 레코딩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앨범은 위의 사진처럼 새로 복각되어 나온 것인데, 어차피 나온지 20년이 넘은 데다 녹음방식도 바뀌어가는 마당에, 거의 전설이 되다시피 한 앨범을 리마스터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죠.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청중의 박수만 빼놓고 싹 뜯어고친 것 같다는 점입니다. 잡음도 다 지워버리고 흐리멍텅한 피아노 소리도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맑게 울리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흐릿한 소리가 남아있는 걸 보면 공연 당시의 소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죠. 녹음도 엉망에 소리도 안 좋다는 뒷말이 무성해서 일부러 리마스터링한 게 아닌가 싶은데, 라이브 레코딩인데도 잡음이 아예 없는 걸 보면 대강 짐작이 가죠.

 

소리야 어찌됐든, 호로비츠의 연주는 꽤 인상적입니다. 물론 다른 연주에 비해서 미스 터치도 상당히 많고, 중간중간에 숨이 찬 듯한 모습도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74세의 고령에 무려 '라흐 3번'을 이 정도로 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죠. 게다가 1악장 카덴차와 2악장, 그리고 3악장의 연주는 대단히 다이내믹해서 웬만한 젊은 연주자의 연주와 비교해 보더라도 그 호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합니다. 거기에 모든 강약을 표현하는 듯한 완급 조절 역시 칭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군요.

 

연주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호로비츠의 과시욕은 단순히 소리에 대한 집착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연주 중간 중간에 피아노가 갑자기 오케스트라를 제껴버리고 앞으로 나서는가 하면, 전반적으로 터치가 굉장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물론 오먼디 스스로가 대단히 두루뭉수리하고 색깔이 강하다거나 확실치가 않은 지휘자인지라 호로비츠의 이런 과시욕을 잘 받아주고는 있습니다만, 이건 오케스트라를 압도한다기보다는, 엄마에게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들리는군요-욕 많이 먹을 소리입니다만 독주악기가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더라도 그 과정 역시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만큼, 이런 부분은 좋게 들리지 않아서 말이죠-. 게다가 소리 역시 리마스터링을 했다고는 해도 원래의 소리가 배어나오는만큼, 전체적인 음반의 가치 자체가 아주 놀랍다거나 불멸의 연주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호로비츠의 나이와 라이브 레코딩인 점을 고려한다면 약간의 놀라움이나 경탄, 혹은 존경을 보낼 수는 있을 것 같군요. 과시욕이건 상업성이건 그의 주변을 떠도는 소문들을 떠나, 74세의 피아니스트가 혼신을 다해 난곡을 연주해 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의를 불러일으키니까요. 이 레코딩이 최고의 연주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 음반이 온갖 찬사를 받는 것은 더 없는 아이러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호로비츠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호로비츠와 이 앨범은,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