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 S.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 피에르 푸르니에 :: 2007. 2. 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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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연주자나 듣는 사람이나 꽤 큰 부담을 갖고 첫 만남을 시작하게 됩니다. 카잘스가 바르셀로나에서 악보를 발견한 이후로 100여 년 동안, 첼리스트라면 누구나 이 곡을 연주해야 했고, 동시에 연주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흐의 다른 곡들-특히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 파르티타-과 마찬가지로, 36조각의 이 모음곡은 '40이 넘어서 바흐를 연주하라'던 레이첼 포저의 스승이 말한 것처럼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함부로 연주할 수 없는 금지곡과도 같습니다. 악보만 생각해본다면 기교적으로 어렵지도 않은-심지어는 저도 몇 개는 연주할 줄 아는- 이 곡이, 수십 년 동안 한 악기를 연마해 온 첼리스트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레퍼토리라는 점은, 별 것 아닌 듯한 이 춤곡들이 사실 결코 녹록치 않은 유산이라는 것을 잘 알려 줍니다.

전문 연주자들에게도 이럴진대, 대부분이 아마추어인데다 선율적인 즐거움 이외의 다른 미덕을 찾기 어려워하는 초보 애호가들에게는 당연히, 얼른 다가서기 어려운 곡임에 분명합니다. 심지어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짧지도 않은 곡들을 꼭 들어야 한다며 추천해 주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요. 게다가 이름만 들어도 무릎이 후들거리는(?) 바흐라는 음악의 신(?)의 대표작(?)이니, 편하게 듣기 좋을 리도, 쉬울 리도 없습니다.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이 연주자에게는 즐거운 동시에 어려운 도전과제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괴로운 시간을 마련해 주듯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역시 잠이 솔솔 쏟아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지요-고백하건대, 디아벨리 변주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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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다가서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연주자들의 '포스'에 있습니다. 바흐 연주의 교범이자 전설로 꼽히는 카잘스는 무슨 바위산처럼 듣는 이의 앞을 가로막죠. 들으면서 가슴이 떨려오는 건 좋은데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또다른 추천 베스트이자 광고음악에 쓰여서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여기는 로스트로포비치는 완전히 악보대로 정확하게 연주하느라 답답함을 안겨주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 보자면, 빌스마는 듣기엔 좋은데 너무 투명해서 그냥 물을 마시는 느낌이고, 비스펠베이 역시 좋기는 하지만 너무 튀는 느낌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파올로 판돌포의 비올 연주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러다보니 음악 꽤나 들었다는 사람들도 모음곡 1번의 프렐류드 말고는 흥얼거릴 수 있는 곡이 없게 마련입니다.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는 그런 점에서 더욱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의 연주를 처음 듣는 순간 드는 느낌은 소리가 아주 굵직하다는 겁니다. 활을 꾹꾹 눌러담으며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특히나 헤드폰으로 듣거나, 스피커의 볼륨을 크게 해 놓고 조용한 곳에서 듣는다면 그 효과는 더 커집니다. 방 안이 다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온 몸을 훑고 지나가죠.

푸르니에의 울림은 카잘스가 들려주는 그것보다 훨씬 크고 두껍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듣는 사람 누구나 다 '산처럼 다가온다'고 표현하는-정말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남들이 말하는 걸 따라가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카잘스보다 두터운 울림인데도,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다는 점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건데, 멜로디만을 놓고 보자면 장조 곡이나 빠른 곡 몇 개를 빼놓고는 느리고 지루하고 심지어는 졸리웁게 진행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온다는 건 곧, 일단 듣기에 편하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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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건 그가 연주하는 음표 하나하나의, 그가 만들어내는 현과 활의 움직임 하나하나의 울림이 그냥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울린다는 점입니다. 다른 그 누구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런 깊고 깊은 울림이 가슴에서 느껴지는 떨림으로 나타나죠. 그래서 저는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넋을 놓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곤 합니다. 심지어는 들을 때마다 속이 쓰리죠. 음의 진동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신기하게도 다른 곡을 들을 때는 그런 적이 없지만, 푸르니에의 바흐 연주에서만큼은 속이 쓰립니다-써 놓고 보니 참 이상한 감동이군요-.

그의 연주는 그래서인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외로움이랄까요, 사람이 혼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최대한, 가장 강하게 이끌어내는 것 같아요. 지금도 집에서 혼자 앨범을 듣고 있는데, 정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은 연주와 연주들입니다. 여기에 푸르니에가 원래 장기로 삼는 유려한 손놀림까지 더해져서 부드러우면서도 굵은, 정말이지 말로는 더 표현하기가 어려운 놀라운 해석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뭔가 더 칭찬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더 말할 수가 없네요. 속이 너무 쓰려서요.

부담감 없이 다가오면서도 깊디 깊은 울림으로 사람의 내면을 두드리는 푸르니에의 연주는, 그래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연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여,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지만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연주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누구에게나 존중받으면서도 자신만의 색채가 확연하고,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연주. 그런 연주는 정말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아마 사람들로 하여금 바흐의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게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은 푸르니에 뿐일 겁니다.

지난 겨울, 밤 12시 반에 과외가 끝나고 나면, 저는 30분이면 걸어올 수 있는 길을 돌고 돌아서 한 시간 반 동안 걸어서 집에 오곤 했습니다. 길가는 눈이 잔뜩 쌓이고, 차가운 바람이 옷섶을 파고들고, 사람 한 명 없는 길을 걸어 오면서 항상 듣고 있던 것은 바로 이 앨범이었습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속이 쓰렸지만, 푸르니에에게 철저히 설복 당하고 공감하면서 바보처럼 행복하게 새벽길을 걷곤 했지요. 아마 올 여름에도, 올 겨울에도, 그리고 혼자 밤길을 흘러갈 때라면 언제나, 제 귀에는 푸르니에가 걸려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