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피에르네 피아노 협주곡 c단조 - 스티븐 쿰스 :: 2009. 7. 25. 00:44






사람이 무언가를 가장 확실하게 인지하게 만드는 기관은 눈입니다.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이라는 뜻을 지닌 '직관적(直觀的)'이라는 표현에 '볼 관(觀)' 자가 들어가는 것은 무연한 일이 아니지요. 믿기 어려운 것은 대개 소문으로 '들리는' 일이 많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뒤에야 믿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논란의 여지야 많겠지만, 현존하는 예술 중 가장 직관적인 장르입니다. 물론 '엑소시스트'처럼 전혀 사실이 아닐 것 같은 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있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도 있긴 합니다만, 그러한 주제의 비실재성 여부를 떠나 생각해 본다면, 영화야말로 여러 종류의 시각예술 중에서도 관객에게 가장 구체적인 사건과 장면을 전달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영화와는 반대로, 음악은 오로지 귀로만 들어야 하기 때문에, 상상의 여지가 가장 많은 예술입니다. 일단 음이라는 것이 형태가 없는 데다가, 그것을 만들고 듣는 행위에도 딱히 꽉 짜여진 틀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직관적인 음악이라고 해도 그것이 보는 것 만큼 구체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보니, 음악의 안마당엔 듣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느낌으로 들을 수 있는, 그리고 같은 곡과 같은 연주를 두고도 서로 다른 해석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8도(度)의 음들-사람에 따라 12도나 혹은 그 이상이라고도 하는 많은 음들-과 수많은 패시지들이 그렇게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는 음악의 안마당에도, 일본식 정원처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큼 정돈이 되어 있고 어느 정도는 '볼 수 있는' 공간이 있긴 합니다. 바로 가장 구체적인 시각예술인 영화와 관련된 부분, '장면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부분, 영화음악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듣는' 범주에 들어가지만, 영화의 장면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영화음악도 결국 '보는 것'에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음악은 다른 음악들보다 조금 더 직관적이고, 들으면 바로 장면이 연상되도록-아니면 휩쓸리도록- 그 분위기에 방향성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영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작곡된 곡, 특히 전혀 상관없는 곡이 영화에 쓰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표제가 되다시피 한 '엘비라 마디간'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단칼에 나누기는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시대구분을 잣대로 삼을 때, 영화음악처럼 직관적인-구체적인 것과는 다른- 면모를 가장 많이 드러내는 시기는 낭만주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는 가끔씩 소름 돋는 관조를 저녁 무렵처럼 채색한 슈베르트나, 그보다 조금 더-어쩌면 많이- 사색적이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어두운 색조가 눈에 잘 띄는 라흐마니노프 정도가 그런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작곡가들이, 그렇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절대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요.

피에르네의 곡을 처음 들은 것은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열 시쯤 됐을까요? 어쨌든 아버지께서 늘 영화를 보시는 시간대였습니다. 바쁜 탓에 음반을 사놓고 듣지도 못하고 있었고, 오늘은 그래도 좀 시간이 되니 한 번 들어볼까, 하는데 아버지께서 웬 음악이 계속 나오는 영화를 보시는 것 같더군요. '어거스트 러쉬'나 뭐 그런, 하여간 음악이 많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째 영화음악이 좀 길다 싶어서 봤더니 바로 새로 산 피에르네의 피아노 협주곡이더군요.

피에르네의 곡은 영화음악으로 착각할 만큼 시각적인 연상효과가 아주 뛰어납니다. 제 경우엔 곡을 듣자마자, 소나기가 내리는, 왼편에는 숲이 있고 오른편에 밀밭이 펼쳐진 언덕길을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악장마다 느낌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쨌거나 왠지 모르게 계속 숲과 소나기가 떠오르더군요.

피에르네에게서 소나기를 떠올린 건 아마도 곡에 반전과 대결이 여러 차례 나타나기 때문일 겁니다. 1악장에서는 계속해서 리듬을 바꾸며 변화를 주고, 3악장에서는 굉장한 속도로 질주하는 와중에도 주제부에서는 피아노의 하강선율과 오케스트라의 상승선율이 교차하면서 포스를 내뿜거든요. 솨아- 하고 쏟아지는 속도감에, 빗줄기기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 잘 안배되어 있는 선율과 화음을 보면 피아노와 작곡 양쪽으로 당대에 일가를 이루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강렬하게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쿰스와 코프의 궁합은 스티븐 허프와 앤드루 리튼의 조합만큼이나 잘 어울립니다. 소나기가 올 때 땅을 본 적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빗줄기는 땅에 떨어지면 그냥 없어지지 않고 위로 한 번 더 튀어오르면서 소리를 내지요. 쿰스의 터치는 바로 그런 빗줄기를 닮았습니다. 코프 역시 그 빠르고 높고 변화가 심한 패시지들을 실수 한 번 없이 매끄럽게 넘어가고, 쿰스의 통통 튀는 연주를 그대로 맞받아치는 걸 보면 또한 범상치 않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소란스런 소나기 덕분에 시원한 여름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