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샤르벤카 피아노 협주곡 2, 3번 - 세타 타니엘 :: 2009. 5. 6. 00:09





영화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는 나름 재미있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쩌렁쩌렁 울려대는 과도한 음향효과 때문에 귀가 굉장히 피곤한 영화였습니다(게다가 극장에서 봤으니 두 시간 동안 굉음에 가까운 크리스마스 노래들과 배경음악들을 소화해 내느라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지요).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고 시골길처럼 사위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제게 그렇게 음향이 빵빵한 영화들은 -전쟁영화를 제외하고는- 기피대상 1호입니다. 아무리 영화가 좋아도 소리가 너무 커서 내용에 집중을 할 수 없다면, 8000원은 마냥 헛방일 수밖에요.

대부분의 악기가 현재에 가까운 모습으로 개량되고 금관악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1800년대 후반, 그러니까 후기 낭만주의와 그 직후의 세대를 살펴보면, 악기들에게 정신이 나갈 듯 커다란 소리를 질러대게 만드는 곡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옵니다. 마치 그동안 작은 소리밖에 내지 못해서 쓰지 못했던 곡을 한꺼번에 써제끼는 것처럼 말이죠. 대체로 처음엔-처음 뿐 아니라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평론가들에게 욕을 얻어먹은 이 쪽 분야의 대표주자는 역시 구스타프 말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샤르벤카 역시 만만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 사람입니다.

프란츠 크사버 샤르벤카(Franz Xaver Scharwenka, 1850-1924)는 20대 초반부터 이미 쇼팽 연주로 명성을 얻었고, 베토벤과 리스트의 곡에도 애정을 갖고 해석에 심혈을 기울인 당대의 명장 중 하나였습니다. 30대 초반부터는 음악학교를 설립해 제자들을 양성했고, 꽤 오랫동안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을만큼 널리 인정받는 교육자이기도 했지요.

작곡가로도 명성이 높았던 샤르벤카는 스스로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피아노를 위한 곡을 많이 썼습니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은 20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작곡하고 수정하며 애정을 보인 장르였습니다. 이 곡들의 악보를 보면 거의 구분이 안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콩나물들이 가득 차 있는데요, 곡을 들으며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입니다. 기교적으로 아주 어려울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편성 자체도 당시로서는 아주 거대한 대편성인지라, 후기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그렇듯이,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함께해야 하는 독주자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상당히 과중한 부담이 지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피아노가 개량되고 음량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케스트라 총주와 마주한다는 것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장판파를 막아선 장익덕이나 박망파에서 적군 사이를 휩쓸고 다녔던 조자룡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특히 피아노 악보나 총보나 표독스러울 정도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그것도 연주 시간이 40분이 훌쩍 넘는- 샤르벤카의 곡에서는 말이지요.

하이페리온이 그간 진행되어 온 '낭만시대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의 주인공, 특히 후기 낭만시대 협주곡의 주인공으로 줄곧 힘과 테크닉을 모두 겸비한 남성 연주자들을 내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당장 샤르벤카의 다른 협주곡을 녹음한 마르크-앙드레 아믈랭과 스티븐 허프는 모두 테크닉과 힘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 중 하나입니다. 피아노를 부숴버릴 듯이 두드리는 이들이라면 언제 어디서 어느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하더라도 전혀 밀리지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하이페리온은 의외로, 독주자로 하여금 금관악기와 함께 주제를 연주하게 한 이 매정한 곡의 독주자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여성연주자를 내세웠습니다. 놀랍게도 '미국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빈에서 공부한 뒤 주로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해 온 터키 태생의' 이 피아니스트는, '이 곡은 원래 이런 거야'라는 듯 봐주는 법도 없이 쉬크하게 금관을 밀어붙이는 지휘자의 압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철저하게 유지하며, 오히려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타 타니엘은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만난 포스 넘치는 여성 연주자인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때려부술 듯 거칠게 두드리며 오케스트라를 몰아세우다가도, 어느새 해를 등지고 선 비장한 거인의 모습으로, 또 어느 순간엔가 다시 땅을 울리며 돌진하는 장수의 모습으로 곡을 소화해 내는 것이, 아, 이런 게 바로 재야고수의 내공인가, 싶을 정도로 강렬합니다. 타격감이 단단한 타니엘의 스타일은 조금은 산만하고 정신없는 협주곡 2번에서도 멋졌지만, 좀 더 단정하면서도 강렬한 협주곡 3번에 더 잘 어울리는군요.

폴란드 출신의 지휘자 스트루가와(l의 가운데에 사선이 그어져 있어 스트루갈라가 아니라 스트루가와라고 발음합니다)는 청중을 잡아먹을 듯한 강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선보이면서도 순간적으로 숨을 죽이며 독주자를 잘 받쳐주었습니다. 물론 타니엘이 이렇게 오케스트라와 일기당천(?)으로 맞붙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아마도 피아노에 바싹 붙어 있었을- 마이크의 힘이 좀 큰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가슴을 뛰게 하는 대결이었습니다. 사진조차 구하기 힘든 이 연주자가, 다른 곡에서 또 한 번 그 강렬함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