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 발레리 게르기예프 :: 2009. 4. 20. 23:35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4악장

(음원은 동 오케스트라와의 실황)

 

어떤 연주회였는지, 어떤 곡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가 처음으로 마주쳤던 게르기예프는 지휘봉에서 검기를 내뿜으며 검무를 추는 것 같았고, 관객들은 범의 눈에 사로잡힌 듯 연주 내내 꼼짝 못하고 있다가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얼어붙은 몸을 풀어 미친듯이 박수를 칠 수 있었습니다. 저도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그제서야 겨우 느낌을 토해낼 수 있었지요. 아, 엄청나다.

 

강렬한 눈빛, 힘이 넘치는 몸짓,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특유의 빠르고 과장된 연주. 저는 이 사람이야말로 므라빈스키-의 연주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음반을 듣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온몸을 휘갑치는 전설적인 바로 그 분-의 후계자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건재한 지휘자들이야 많았지만 그래도 역시 콘드라신과 므라빈스키라는 두 거봉이 있던 산맥을 그들만으로 채우기엔 아쉬웠으니까요.

 

그렇게 므라빈스키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때, 게르기예프가 갑자기 턱수염을 쓸면서 예의 그 강렬한 눈빛으로 저를 붙잡은 겁니다. 꺼져가는 불빛 같던 마린스키 극장을 다시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고, 발레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역시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의 이력도 이력이거니와, '키로프의 차르'라는 칭호의 그 강렬함에 팍 꽂히기도 했지만, 역시 게르기예프에게 꽂힌 건 그 간지 넘치는 턱수염과, 수많은 예술사진들을 만들어낸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 모습, 그리고 야성적인 연주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앨범에서 20세기 중반을 주름잡았던 러시아의 박력을 기대했습니다. 볼로도스의 라흐마니노프 앨범에서 느꼈던 '이 사람이야말로' 하는 그런 기대, 아니면 호로비츠가 차이코프스키 앨범에서 내뿜었던 폭풍같은 기백을 다시 보고 싶은, 그런 기대였죠. 더군다나 앨범 자켓을 채우고 있는 게르기예프의 강렬한 표정과 -특히 턱수염과- 몸짓은 그런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놓았습니다.

 

1악장을 여는 묵직한 울림이 이어지고, 파곳이 낮게 깔린 잿빛 구름처럼 으르렁대며 솔로를 연주할 때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현악기들이 유명한 주제를 연주할 때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관악기들이 합세하면서, 저는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분명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게르기예프의 스타일대로 잘 조련이 되어 있어서인지 금관은 얼어붙은 공기가 와 닿듯 강렬했고, 목관 역시 소리 안에 어두운 숲을 잘 갈무리해 두고 있었습니다. 첼로, 콘트라바쓰와 바이올린들 각각의 질감도 좋았습니다.

 

그럼 생선가시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연주회가 성공적이면 칭찬을 받는 것은 오케스트라 뿐이고, 실패했을 때 욕을 먹는 것은 지휘자 뿐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래도 현악과 관악 모두가 괜찮은 기량과 컨디션을 보였는데 이상하게 총주 때만 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은, 정말로 지휘자가 생선가시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이 음반을 녹음할 당시 게르기예프의 리딩에 어딘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더 모나게 튀었으면 하는 부분에서는 여지없이 악구의 특징이 흐려지고, 여기서는 일관되게 밀어붙여야지, 하는 부분에서는 웬걸, 오히려 신경질적으로 갈라져 버립니다. 어느 정도 과장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래도 튜바는 너무 째지는 소리만 냈고, 금관이 안정된다 싶으면 이번엔 현악기들이 저마다 재잘거리며 애써 모인 집중력을 흩어버립니다. 첼로와 콘트라바쓰의 소리는 너무 울리고, 그러다보니 1, 2 바이올린들은 너무 수다스러워 보이고요. 목관은 잘 나가다가도 어설프게 중후한 목소리를 내고, 끄트머리도 제대로 처리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특히 4악장에서 그냥 비벼대는 듯한 현악기들의 질주는 그냥 넘기기엔 약간 괴로울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곡을 모두 다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게르기예프는 무엇에 쫓기는 듯 자꾸만 급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악기들이 제 기량을 다 내지 못하고, 중요한 부분에서는 박자가 약간씩 어긋나서 소리가 흩어지고, 산만해지는 것 같습니다. 리더가 확실하게 박자를 잡아주지 못하면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뭉개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게다가 이 앨범에서 키로프가 들려주는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음의 진동은 차이코프스키보다는 말러 쪽에 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생선가시가 좀 크긴 하지만, 그래도 이 앨범은 게르기예프의 스타일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팬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음반이 될 수 있겠습니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특유의 과장된 화법과 몰아치는 박력은 여전히 다른 지휘자들과는 선을 그어놓는 분명한 특징이니까요. 이 앨범에서야 그리 대단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빈 필과 녹음한 최근 앨범이나 연주회장에서 만나는 게르기예프의 차이코프스키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모습이라고 합니다. 뭐, 차르도 가끔은 감기에 걸릴 수 있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