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알렉산더 멜니코프 피아노 리사이틀 :: 2009. 11. 30. 22:05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어찌보면 지나치게 운명론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잘 하지 못하는 것,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도 물론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겠지만, 그에 앞서 우선 자기가 이미 잘 할 수 있는 것을 갈고 닦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롭고 의미 있으며 동시에 어려운 일인지는, 멀리 가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손을 대다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마저 말아먹은 주변의 많은 사례들이 잘 이야기해 줍니다.

8월 중순쯤이었나요, 알렉산더 멜니코프의 내한공연 프로그램이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로 잡혀있는 것을 보고는 약간 아쉬웠습니다. 몇 차례 들어본 멜니코프의 라흐마니노프는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왕 오는 거 먹던 솔잎을 들고 왔으면 했거든요. 물론 연주회에서 꼭 자기가 낸 음반만 연주할 필요는 없고, 또 많은 연주자들이 앨범으로 녹음하지 않은 곡들을 무대에서 연주하긴 합니다만, 라흐마니노프에서의 멜니코프는 지난해 비스펠베이를 반주하던 것보다 워낙 반짝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조금은 진했습니다.

안경을 쓰고 나와 조금 더 학구적인 인상을 주면서 시작한 28번은 그 모습에 꼭 들어맞게 전개됐습니다. 처음에는 꽤 자유로운 스타일이었지만, 이내 상당히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단단한 타건을 무기로 1악장에서 농밀하게 유지하던 긴장감을, 2악장에서 아낌없이 분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리히터의 재래'라더니, 진짜로 리히터랑 좀 비슷한 것도 같고, 특히 쉼표를 충분히 활용하며 완급을 조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주홀의 음향이 둥글둥글한 탓에, 멜니코프의 타건은 그 이상의 힘을 받지는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에 워낙 모범생 스타일인 멜니코프의 성향이 더해져서, 연주에 제대로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끔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리히터의 강렬함이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소나타 30번에서는 이 문제가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체적으로 음색이 흐트러지고, 중요한 곳에서 꼭 미스터치가 나는 데다, 연주에 몰두하지 못하고 대강 훑는 듯한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2악장의 당김음도 강약 조절이 제대로 안됐고, 그나마 화려하게 마무리하려던 피날레마저도 부족한 음향 탓에 무감동하게 끝나버렸습니다.

인터미션 뒤에 이어진 소나타 31번에서도 호흡이 끊어지고 박자가 맞지 않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특히나 2악장은 느린 데다 강렬함도 부족했고, 고난도의 하강 패시지는 불안하기 짝이 없어서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다만 3악장은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을 이용하며 러시아 특유의 고독함과 음산함-마피아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이 부분을 들으면서 멜니코프의 스타일이 화려함보다는 무겁고 침잠하는 쪽에 잘 맞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죠. 여전히 중요한 부분에서 한 방씩 꼭꼭 틀려주긴 했지만요.

객석의 불이 채 꺼지기도 전에 시작한 마지막 소나타 32번은 그래서인지 갑작스럽게 몰입도가 쫙 끌어올려졌습니다. 문제는 몰입이 될 만하면 튀어나오는 미스터치였죠. 프레이징은 너무 끊어먹고, 전체적으로 많이 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피아니시모가 자주 나오는 2악장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마냥 아주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무래도 피아니시모에 생래적인 강점을 지닌 게 아닌가 싶더군요.

아무리 봐도 썩 좋지 않아 보였던 멜니코프의 컨디션은, 원래 먹던 솔잎이 입에 닿자마자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앨범으로도 발매된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은 본 공연의 아쉬움을 한 방에 달래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햇살 아래 따끈따끈하게 덥혀진 흑토를 연상시키는, 베토벤에서 보여줬던 2% 부족한 모범생의 모습은 어디가고 자기만의 개성을 마음껏 펼쳐 보인 연주였거든요. 음반에서 듣던 것보다도 훨씬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앙코르곡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스크랴빈의 환상곡이었던 것 같은데-아니면 같은 회화적 연습곡이었을지도...이래서 공연 리뷰는 바로바로 써야 하는 건데 말이죠-, 여기서도 만족스러운 연주를 보여주었습니다. 베토벤만 놓고 보면 피아니시모 위주의 단정한 곡에만 강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앙코르에서는 또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 같더군요. 사과가 가끔은 속보다 껍질부분이 더 맛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번 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인 베토벤 소나타에서의 부진은 아무리 봐도 연습부족, 준비부족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암보도 안 했고-비스펠베이와의 연주 때도 그렇긴 했지만-, 연주 내내 넘어질듯 불안불안한 전개만 봐도 그렇지요.

그리고 아마도 준비부족은, 쓸데없이 연주자와의 친분만을 늘어놓은 기획사 대표-뮤지컬 기획사라고 하더군요-에게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멜니코프 정도 되는 연주자가 이 정도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솔로 리사이틀을 진행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거든요. 얘기하는 김에 더 해보자면, 이번 공연은 약간 아쉬웠던 알맹이보다도 어설프디 어설픈 껍데기 때문에 더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2천원이나 받고 팔면서 동네 오케스트라만도 못한 프로그램은 곡 해설마저도 인터넷에서 대충 갖다 붙인 티가 팍팍 나고, 연주자의 말보다는 기획사 대표의 자기자랑이 더 많았지요. 게다가 무대 위에는 웬 협탁에 스탠드, 의자를 피아노 뒤에 갖다 놔서, 이게 무슨 연극무대인지, 아니면 멜니코프가 거기에 앉아서 청중들과 얘기라도 나누는 건지, 헷갈리게 만들더군요. 곡과 곡 사이에 지각한 관객들을 들여보내서 집중력이 확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어쨌거나 성격좋은 이 아저씨가 뮤지컬 기획사 대표가 친분을 내세우며 무리하게 준비한 스케줄을 거절하지 못해 별 수 없이 진행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번 연주회는,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기대감 또한 남겼습니다. 아마 준비를 잘한다면 훨씬 더 좋은 연주를 들려줄 거라는 기대감 말입니다. 그닥 좋지 않은 흐름 속에서도, 멜니코프는 청중들에게 자기 솔잎만큼은 정말 끝내준다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켰으니까요. 다음 번 무대에서는 조금 더 좋은 모습으로, 악수할 때 저번 연주회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오늘 연주 정말 끝내줬다!'고 말할 수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