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드보르작 교향곡 7번 - 오트마 쥐트너 :: 2010. 3. 14. 22:40





많은 사람들은 타이거 우즈나 알렉스 로드리게스처럼 자기 분야를 장악한 '1등'들의 활약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곤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이미지는 섹스스캔들과 약물복용으로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지금도 필드에 나서면 스코어보드의 맨 위에 이름을 올리고 홈런레이스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할 수 있는, 그야말로 '특등급'의 스타들이죠.

하지만 재미있게도, 저렇게 굉장하고 특별한 스타들만이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포츠의 감동이라는 것이 그라운드를 휘젓는 무수한 천재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말이죠. 옆집 김씨 아저씨가 뛰는 동네축구, 학교 체육시간에 벌어지는 야구에서도 얼마든지 감동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물론, A-Rod가 홈런을 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긴 하겠지만.)

클래식 음악계에도 S 하나로는 모자르는 특등급 스타들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카라얀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어찌됐건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수 세대를 쥐락펴락 했으니 분명 SSS급입니다. 또, 곡마다 스탠다드나 최고의 연주로 꼽히는 명연들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죠. 오늘 소개하는 드보르작의 교향곡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바츨라프 노이만(Vaclav Neumann)의 연주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울 겁니다. 어쩌면 케르테츠나 줄리니의 연주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 많은 S급 연주들 중에서도 조용히 자신만의 빛을 발하고 있는 연주가 있으니, 바로 오트마 쥐트너가 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 함께 한 전집입니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야 대단히 유명한 연주입니다만, 또 어떻게 보면 무수한 명연들과 명지휘자들 사이에 묻혀 까맣게 모를 수도 있는, 그런 연주입니다.

오트마 쥐트너는 1922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나 1942년부터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활동 당시에는 카라얀의 뒤를 이을 대가로까지 평가받으며 오페라와 교향곡을 가리지 않는 재능을 보였고, 또 음악 교육에도 오랜 기간 힘써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독에서 주로 활약한 데다 명성을 얻는 것을 꺼리는 성격 때문에 국내에서는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크게 이름을 얻지 못했지요(그래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쥐트너의 음반은 활동 기간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쥐트너의 연주에서는 약간의 생경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서구 연주자들처럼 완벽하게 조율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연주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구권 연주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거칠거나 때로는 폭압적인 질주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연주들에 묻히지 않는, 같지도 않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고 해야 할까요, 매일 그냥 인절미만 먹다가 어느날 갑자기 쑥인절미를 먹었을 때의 그런, 약간 '다른' 느낌입니다. 이런 것을 '생동감'이라고 하는 걸까요?

강렬한 금관과 저음역에 전체 파트가 쉽사리 묻힐 수도 있는 곡임에도, 이 연주에서는 놀랍게도 거의 모든 파트의 소리가 하나하나 다 들립니다.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곡인 만큼, 이런 균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1악장과 3악장의 폭풍처럼 몰아치는 격정 속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 곡에서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목관 파트도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2악장 도입부의 고즈넉하고 서글픈 클라리넷 솔로부터 3, 4악장의 질주하는 총주에 이르기까지, 조금은 거칠지만 충분히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반은 목관의 몫이니까요.
 
날카롭게 튀어나오지도 않고, 멜로디에만 치중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새 멜로디가 굴러가고 있는 쥐트너의 진행은, 아마도 드보르작이 생각했던 바로 그런 연주가 아닐까 싶습니다(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4악장은 절제가 지나친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생 때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뒤늦게 가입해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던 곡이고, 지금도 거의 모든 부분을 다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사랑하는 곡인지라, 이렇게 음색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훌륭한 연주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2008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는 '아버지의 음악'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가 바로 오트마 쥐트너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아들인 이고르 하이츠만 감독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와의 시간을 추억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알츠하이머로 인해 지휘봉을 놓고 은둔하던 쥐트너는, 은퇴로부터 거의 20년, 그리고 아들이 자신을 위해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지 약 2년여가 흐른 지난 1월 8일,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