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 2번 -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 2007. 2. 1. 15:10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 



저는 물건 관리를 잘 하는 편입니다-퍽이나-. 아 예, 물론 저도 필요한 물건을 어딘가에 잘 둔다고 감춰두고 나중에 찾는다고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일은 가끔-이라고 쓰고 '매우 자주'라고 읽습니다- 있어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을 온몸으로 실천해보이고 있지요. 하지만 엄마의 엄청난 구박 속에-심지어는 지금도- 힘겹게 모은 CD들은 꼭꼭 잘 챙겨서 없어지지 않게 한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잃어버려서 무려 세 번이나 사게 된 녀석이 바로 이 앨범입니다.

  

사실 잃어버렸으면 그만일 수도 있는 CD를, 똑같은 타이틀임에도 불구하고 세 번씩이나 산 것은, 당연히 이 앨범이 좋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Philips 50 시리즈가 아니라, 그냥 예전에 나왔던 타이틀이었죠. 처음 산 CD가 없어지고 난 뒤 마침 리마스터링 된 것이 나왔길래 또 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없어지더군요. 그리고 약 2년 동안 엄마의 압박으로 인한 구매의 공백으로 꽤 긴 시간 동안 잊고 지내다가, 요즘들어 다시 미친듯이 지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구매목록에 올렸고, 결국 다시 손에 넣게 되었죠. 그리고 이 앨범은 한두푼도 아니고 만원이 훌쩍 넘는 CD를 세 번 사게 할 만큼의 값어치가 충분합니다.

 

리스트는 그 자신이 엄청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곡도 자연스럽게,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쪽으로 많이 썼습니다-마치 대단한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가 그 어려운 협주곡을 작곡했듯이 말이죠-. 리스트의 그 대단한 피아니즘은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니콜로 파가니니와 비견할 만 한데, 파가니니의 곡들은 이제 웬만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반면, 리스트의 곡들, 특히 초절기교 연습곡 같은 것들은 여전히, 전공자나 연주자들에게도 어려운 곡으로 손꼽히고 있지요.

 

그가 작곡한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역시도 강렬한 타격감과 빠른 연주속도, 난이도가 꽤 높은 테크닉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들에게 약간은 난곡으로 꼽힙니다. 그래서인지 리스트의 독주곡들보다 훨씬 적게 연주되는 편이죠. 게다가 독주 파트의 상당한 빠르기를 따라가야 하고, 역시나 강력한 포스를 내뿜어야 하며, 심지어 트라이앵글마저 부각시켜야 하는 점 때문에, 오케스트라에게도 역시나 꽤 어려운 곡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앨범은 들어보기 전부터 상당한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피아노는 에밀 길렐스마저도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라고 여겼던 리히터인데다, 지휘자는 이름만 들어도 믿음직스러운 콘드라신이니까요. 아이쿠, 오케스트라가 모스크바 필이면 +α가 됐을텐데 좀 아쉽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막상 들으면 생각이 싹 바뀌실 거예요.

 

리히터는 역시나 리히터입니다. 와, 정말 어쩜 그렇게 표현력이 넘치는 건지, 정말 리스트였더라면 이렇게 연주했겠구나 싶어요. 독주자가 지녀야 할 미덕이란 미덕은 다 지녔습니다. 마치 해머로 나무책상을 두들기는 듯한 시원시원한 타격감하며,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명민하게 착착 잘 맞아 돌아가고, 모든 음표를 하나하나 정확하게 짚어주는데다, 가장 중요한 쾌활한 속주마저도, 거기에 달콤한 햇살같은 여린마디와 카덴차까지, 정말이지 모범 중의 모범 같은 연주입니다. 특히나 협주곡 1번의 주제부는 듣기만 해도 신이 날 정도로 쾌활하게 진행됩니다.

 

콘드라신도 역시나입니다. 런던 심포니, 하면 우아하고 고아한 사운드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텐데, 이건 무슨 모스크바 필을 지휘하고 잇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런던 심포니에서 이런 야성적인 관악군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게 놀랍군요. 현악파트도 총주에선 강렬한 음향을 내뿜다가도, 피아노와 대화하는 부분에서는 서정미가 넘쳐 흐릅니다. 게다가 독주 파트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짜임새는 정말 대단합니다. 특이하게 출현하는 트라이앵글은 마치 합창단 앞에서 독창하는 어린이 같은 느낌이죠. 이 곡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역시나 그 특유의 리듬감인데, 콘드라신은 이 리듬을 아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이 음반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모두 최대한의 음량을 뿜어낸다는 점입니다. 마치 온 힘을 다해서 내리치고 그어대는 것처럼, 연주자들의 움직임과 땀 한 방울까지 느껴질 정도 큼직큼직한 소리들을 내어뱉죠. 특히 협주곡 2번의 3악장의 첫부분은 부조니의 피아노 협주곡이 떠오르게 하는-연상 순서가 거꾸로 됐군요- 거대한 진동을 지녔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모두, 음향이 전혀 왜곡되지도, 뭉개지지도 않고 너무 또렷하게 잘 들립니다. 어쩜 그렇게 확연하게 잘 들리면서도 조화롭게 연결되는 건지, 이건 단순히 리마스터링의 힘이 아니라 연주와 녹음 자체가 굉장히 잘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쓰다 보니 원래 성격에 안 맞게 너무 좋은 얘기만 잔뜩 늘어놨군요. 하지만 그 정도로 이 앨범은 잘 된 레코딩이고, 리스트를 들어보고 싶으시다면 반드지 들어보아야 할 앨범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앨범 하나면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평생 질리지도 않고 신나게 듣게 될지도 몰라요. 정말정말 명민하고, 유려하고, 강렬하고, 온갖 좋은 수식어는 다 같다 붙여도 될만한 명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