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탑 속에 갇힌 천재의 노래 - 글렌 굴드 :: 2007. 2. 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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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1955년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처음 듣고 난 저의 감상은, '놀라운'이나 '파격적인' 같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글렌 굴드의 바흐는, 분명, 다른 어떤 누구와도 다른 연주이죠. 놀라우며, 파격적이고, 독창적인데다, 천재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글렌 굴드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은 지금에 와서는, '오싹한' 혹은, '섬뜩한' 따위의 형용사들로 바뀌었습니다.

굴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천재'입니다. 천재라는 말을 빼놓고는 그의 인생이건, 피아니즘이건, 뭐든 설명이 안 되니까요. 굴드는 천재가 맞습니다. 그런데 천재가 대체 뭐죠? 한 번 솔직하게 톡 까놓고 말해 봅시다. 천재가 뭘까요? 하늘이 내린 재능? 남들이 못 하는 걸 할 수 있는 사람? 남들과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지닌 사람? 독특하게 튀어나온 성격과 특징들?




사실 저는, 천재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긴 '이러이러한 기준에 만족해야 천재다'하는 커트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뭐 하나를 미친듯이 잘 하면 천재겠지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어떤 분야에 대단한 재능을 보인 사람'일 수도 있겠군요. 재미있게도, 우리 주변에도 천재는 생각보다 꽤 많더군요.

요즘들어 음악사 책을 열심히-말로만- 읽고 있는데, 음악사건 뭐건, 어떤 분야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정말이지, '아, 웬놈의 천재들이 이렇게 많아?'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모차르트, 멘델스존, 누구, 누구, 기억하기도 귀찮고 생각도 잘 안 나는 그 무수한 천재들의 홍수. 물론 그 사이에는 천재는 아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재능을 더 크게 키운 사람들도 많죠. 하지만 사람들이 노력가들을 기억할까요? 모차르트로부터 25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모차르트지 살리에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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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최근으로 올 수록 천재는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 시대와 가깝기 때문에 좀 더 낮은 평가를 받고-슈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정확하고 자세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남게 되는 근-현대의 음악사에서, 천재의 출현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울리지 않게 심각하고 구조적인 이야기를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역사가 현대로 진행되며 민주화가 심화될 수록 대중들의 영향력은 커집니다. 정치적이건 경제적이건, 모든 분야에서 대중들은 그간 상류층의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었던 '그 무엇'을 향유할 수 있게 되죠. 향유계층의 절대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취향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취향이 널리 퍼지게 되고, 예전에는 그저 '다른' 취향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이상한' 취향이 되어버리는 거죠. '취향의 병목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클래식 음악은 이 병목현상이 벌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분야입니다. 예전에는 소수의 귀족층만이 즐기던 음악이 이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장르가 됐지요.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모여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은, 이제 병목의 위치에서 다른 쪽을 내려다 봅니다. 이제는 오히려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계를 좌우하는 권력계층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평론가들의 권력이 무섭다고야 하지만, 관객이 들지 않는 공연은 실패하며, 팔리지 않는 CD는 절판되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는 다른, 뭔가 독특할 수 밖에 없는 천재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겠지요. '어, 저기 이상한 애들이 있네?' 그리고는 무시해버립니다. 이상하니까요.




굴드는 아마도 표준편차의 한쪽 끝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인생은 온통 독특함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이 넘쳐 흘렀고, 정식 음악 교육 없이 어머니에게서만 피아노를 배웠고, 그나마 한 때 배우던 스승과는 금방 사이가 틀어져 버렸죠. 아니 뭐 이런 건 제쳐놓고라도, 굴드는 그 희한하기 짝이없는 자세만으로도 우리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만년엔 프로그램 제작에 시간을 투자하고, 짜깁기 녹음을 계속 시도했으며, 평생 동안 심기증으로 공포에 떨다가 정작 심각한 증상이 왔을 때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엔 죽었죠.

아아, 정말이지 굴드는 독특한 사람입니다. 잠깐, 우리가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건 굴드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정말 굴드가 아니라는 거죠. 물론, 그의 겉모습들은 그 내면의 반향이겠지만, 그래도 그건 음악인으로서의 굴드의 참모습은 아니죠. 우린 거기에 너무 현혹되지 말아보자구요. 정말로 굴드는 이상한 애였을까요? 네, 겉으로 보기엔 표준편차 그래프에서도 저쪽 끝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멀리에 쭈그리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그 음악도 저 끝에 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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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앞서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이 머쓱할 정도로 굴드는 저 끝에 서 있긴 하군요. 하지만 앞서 말한 것이 그렇게 아깝지만은 않네요. 굴드가 완전히 저 끝에 서 있는 건 다만 바흐의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그것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만요. 무슨 얘기냐하면, 굴드는 사실 그렇게 엄청난 파격을 언제나 저지르고 다니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한 번, 그 동안 들어본 굴드의 음반들을 되새겨 보세요. 55년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제외하고, 굴드가 과연 '미친 피아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 보시길 바라겠습니다.

물론 굴드의 해석은 저마다 독특함이 살아 숨쉬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대부분, 그냥 맑은 음색과 약간은 특이한 템포, 그리고 꽤 자주 보이는 숨 막히는 속주일 뿐이죠. 제 생각엔 55년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뛰어넘는 미친 짓은 없는 것 같습니다. 55년반은 정말 '굴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해도 될 정도죠. 반복 패시지는 한 번만 연주한 채로 잘라 먹어버리고, 남들은 1시간 걸리는 연주를 30여분 만에 뚝딱 해치워버린 데다, 피아노를 스스로 만들다시피 해서 연주했으니까요. 덕분에 우리는 마치 포르테피아노와 비슷한 음색으로, 뭔가 한 박자씩 나사가 떨어져나간 것 같은 골드베르크를 듣게 되었죠-나쁜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가 1981년에 두 번째로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대단히 일반적인 방식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굴드 특유의 허밍이 간간이 들리지만, 그건 피아노가 아니라 허밍이고, 단지 굴드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던 머릿속의 음악이 구현된, 일종의 음악에의 반응일 뿐입니다. 더구나 다른 작곡가들의 곡에서, 굴드의 연주는 그렇게 미치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좀 특이하고, 대체적으로 빠른 연주일 뿐이지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는 좀 틱틱거리면서 진행되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는 거의 난타 수준의 진행을 보여준다는 점 이외에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표준편차에서 좀 벗어나 있는 수준이지요.




굴드는, 그저 좀 특이하고, 바흐에 있어서는 아주 특이한 행보를 보여주었던, 약간 특이한 피아니스트였을 뿐입니다-평가절하의 의미가 아닙니다-. 미치기는 커녕, 그가 오르간으로 연주한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들어보면, 전혀 특이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도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연주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해야겠군요. 피아노만큼이나 오르간도 기가 막히게 다뤘다는 점 말이죠.

요점을 말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굴드의 음악을 듣고, 그에 대한 평론을 읽고, 그의 일생에 대한 책을 본 여러분은, 어쩌면, 혹시, 그의 겉모습이나 행동이 만들어내고, 평론가들과 언론이 증폭시킨-어쩌면 튀어나온 부분을 깎아버린- 껍데기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솔직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글렌 굴드라는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그의 연주라는 것을 모르고 듣는다면, 그렇게 특이하고 미친 연주입니까? 물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굴드는 과대포장되어 있어요. 마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처럼, 우리는 그의 연주를 접하기 전에, 이미 겁에 질려서는 항복할 준비를 하고 말죠. 굴드를 이런 괴물로 만들어버린 건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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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시간이 되신다면, 그간 사 놓은 음악 잡지들의 과월호를 쌓아놓고, 아니면 인터넷에서 '글렌 굴드'를 검색하신 뒤에, 천천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90%는 이런 내용일 겁니다. '천재, 대단한 천재, 미친 피아니스트' 등등. 잡지에서 굴드의 음반을 평할 때도 오로지 칭찬 일색, 굴드에 대한 인터뷰를 소개할 때도 그 내용은 오로지 칭찬 일색, 아니 이건 아예 찬양이 아닐까 싶을 정도죠-부정적인 기사는 딱 한 번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부로 그에 이견을 달지는 못하고, 그냥 따라거 버립니다. 평론가들과 잡지사 기자님들은 똑똑하고, 무서운 분들이거든요.

굴드의 껍데기는 굴드 스스로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너무 특이했어요. 특이한 자세, CD에서도 확연히 들리는 허밍, 오로지 자신만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끊어버리는 대인관계, 무엇을 하건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성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약한 부모에 대한 의존, 심기증, 커버가 다 뜯어져도 수리하면 안 되는 자신만의 의자, 연주하기 전에 언제나 준비되어야 하는 따뜻한 물, 연주회장의 습도, 청중, 온도까지. 이런 독특한 모습이 굴드의 껍데기를 형성해 왔고, 언론과 청중들의 비정상적인 관심이 그 위에 한 겹의 외피를 덧둘렀죠.

굴드는 천재가 맞습니다. 저런 생각을 해 내고, 저런 속도로 연주를 해내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굴드밖에 없는 것이 맞긴 맞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연주를 하는 걸 보면 약간 미친 것도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하기야 미치지 않으면 천재가 아니기도 하겠네요-. 그리고 그 천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물에 숨거나, 혹은 갇혀버렸죠. 그래서 제게 굴드의 연주는, 갇혀버린 공간에서 미친, 그런 괴괴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따금 역사는 갑자기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세계는 그 후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에 있어서는 보편과 특수, 멈추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한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 위기를 구현하는 존재다...위기에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 속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부르크하르트는 '세계사에 관한 고찰'에서 위대한 인물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 '위대한 인물'의 특징은,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지요. 하지만 한 부분이 다르군요. 역사는 천재에게 자신을 응축시키긴 하지만, 그를 지도자로 내세우진 않나 봅니다. 흔히 천재들이 외로움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 떠나는 것처럼, 굴드의 말년이, 그리고 죽음이, 수없이 날아든 위문편지에도 불구해도 외로웠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