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스티븐 허프 피아노 리사이틀 "변주와 왈츠" :: 2008. 7. 9. 01:21

 

 

멘델스존 '엄격 변주곡'(음원은 2008년 런던 실황)

 

 

"……긴장이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이 소나타 첫 악장의 마지막 C장조 코드로부터 주제의 발전보다는 조성과 컬러가 점차 발전하는 변주들의 진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테크닉은 화학 실험실의 그것과 같습니다. 즉 경쾌하고 즐거운 세포 하나가 무아경 이후 희미하게 빛나는 트릴로 흩어져 나선형을 이루며 상층으로 뻗어 오를 때까지 점점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되듯이."

 

지적이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물빛같은 이 문장들은 2008년 1월 'The Sixth International Poetry Competition'에서 우승한 시인이 같은 해 6월 1일 한국에서 있었던 자신의 연주회를 위해 쓴 글입니다. 이 짧은 글의 주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이었고, 이 글을 쓴 시인은 실력있는 문장가일 뿐만 아니라 -논란의 여지는 좀 있겠지만- 자기 세대의 가장 중요한, 아니 당대의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인 스티븐 허프(Stephen Hough)였습니다.

 

마치 찬 것과 더운 것이 함께 놓여있는 부페나 샐러드 바처럼, 이 날 허프의 연주회는 '변주'와 '왈츠'라는 두 개의 작은 리사이틀이 묶인 형식으로 구성됐습니다. 저녁 무렵의 LG아트센터에 실력있는 주방장이 요리한, 수프와 연어와 이것저것 먹음직스러운 샐러드 바가 차려진 셈이지요. 하지만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샐러드 바라고 해도 맛있는 음식이 따로 있고 맛없는 음식이 따로 있듯이, 이 날 허프가 차려내온 샐러드 바 역시 입맛에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이 함께 올라 있었습니다.

 

청록색이라고 해야할 지, 짙은 청옥색이라고 해야할 지 알 수 없는 특이한 색의 구두를 신고 무대에 등장한 허프가 처음으로 선보인 수프는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Variations serieuses, op.54)'이었습니다. 멘델스존답지 않게 묵직하지만 또한 멘델스존답게 화려하고 다층적인 변화가 강렬한 곡이기 때문에, 주로 음감이 가벼운 곡들을 연주해왔던 허프에게 잘 어울릴지가 의문이었습니다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허프의 왼손 터치는 생각보다 훨씬 육중했고, 아티큘레이션은 급반전하는 곡의 흐름 속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내리꽂는 타건에서는 묵직한 비르투오시티가 넘쳐났습니다.

 

역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처럼 강렬한 느낌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어느 순간은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점에서 곡의 음악적 특징이 아주 잘 묘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허프의 멘델스존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도 감정의 울림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아주 잘 차려진 음식이었습니다.

 

두 번째 곡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은 멘델스존에서 보여주었던 무거운 터치를 이어간다는 느낌으로 시작됐습니다. 도입부의 임팩트는 강렬한 대비 효과를 노린듯 짧고 건조했으며, 강한 인상을 남기려는 의도가 역력했습니다. 때문에 1악장은 그간 허프가 보여주었던 화려한 테크닉과 유연한 터치보다는 오히려 절도있고 무거운 터치로 일관하는, 사자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는데요, 오히려 이러한 시도가 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날 LG 아트센터의 잔향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길었고, 이 때문에 강건하게 밀고 나가는 허프의 음색은 짧고 간결한 페달링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뭉개지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연주자 자신도 이를 의식했는지 성급하게 진행하는 모습도 보이기까지 했는데, 역시 허프의 평소 연주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때문에 시종일관 무겁고 둔중하게 진행된 1악장이 끝나고, 유머가 넘치는 2악장으로 들어갔을 때, 좀 더 유려한 해석을 기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허프는 2악장에서도 서두르는 모습이었고, 그답지 않은 미스터치를 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허프 정도 되는 테크니션이 엇박으로 분절되는 하강선율에서 그처럼 딱딱하고 재미없는 표현으로 일관했다는 점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잊어버린 악보를 다시 떠올려가며 겨우 맞춰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했고, 그 때문인지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악상 변화의 표현은 나쁘지 않았지만, 음 하나하나의 표현이나 곡 전체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힘이 많이 부족했고, 특히나 연주자 스스로가 즐겁지 못한, 마지못해 물에 동동 떠 있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다 식은 갈비찜처럼요.

 

개인적으로 1부의 뒷맛이 개운치 못했기 때문에 2부의 '왈츠'에서는 좀 깔끔한 맛을 느끼고 싶었는데, 허프도 자신의 연주가 좋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2부 첫 곡인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에서는 대단히 유머러스하면서도 극도로 잔향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의도적으로 장난스럽게 표현된 듯한 앞부분의 권유와 거절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곡에서도 뒷부분으로 갈 수록 박자가 흐트러지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강해져서 아쉬웠습니다. 산화되서 뒷맛이 떫어진 화이트와인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어진 네 곡의 왈츠에서도 급하고 건조한 모습은 여전했습니다. 스스로도 연주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페달링을 자제하고 짧고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다른 곡이 시작됐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릴 정도로, 곡과 곡의 사이에 여유를 두지 않고 후다닥 지나가 버린 느낌이었죠. 쇼팽이야 그렇다 쳐도 생상과 샤브리에의 왈츠는 평소에 듣기 어려운 곡들이라 좀 귀담아 듣고 싶었는데, 연주자와 함께 정신이 없어진 통에 어느새 잔향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나마 드뷔시의 곡에서 어느 정도 여유와 관조를 되찾은 것이 위안이었습니다.

 

허프가 1부 중반부터 2부 중반까지 이어진 난조에서 벗어난 것은 리스트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경우에 따라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기도 한 그는, '잊혀진 왈츠'에 거쳐 '메피스토 왈츠'에 닿자마자 드디어 자기 영역에 들어서서 안도한 것처럼, 자신감 넘치는 터치를 되찾고 제대로 된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음과 음, 악상과 악상, 동기와 동기들은 막힘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고, 무대에서는 허프가 뿜어내는 포스가 객석으로 흘러 넘쳤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것이 '메피스토 왈츠'였던만큼, 오히려 강렬하고 인상적인, 성질 좀 있어보이는, 이제까지 잘 되지 않은 연주에 입을 삐죽 내밀고 '그것보다는 이게 진짜 내 연주요' 하는 듯한, 그런 리스트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나 그 전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던 페달링에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강렬하게 밀고 나가는 포르티시모의 극단적인 완급은 아주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 날 허프가 차린 음식은, 메인 메뉴 두 가지가 아주 훌륭했고 기억에 남는 맛을 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습니다. 후식으로 내온 세 번의 커튼콜도-그 중 하나는 허프가 대만 민요를 직접 편곡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좀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만, 역시 좋더군요. 중간의 몇 곡은 좀 불만스럽고, 또 관중들의 매너는 불만스러운 정도를 넘어 심히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만-뒷자리의 선생님들이 데려온 중고등학생들은 계속 부스럭대고 코까지 골며 자고, 앞자리 여성 둘은 1부 내내 속닥대더니 1부가 끝나자마자 나가버리고, 맨 앞쪽의 일부 여성 관객들은 심하게 반짝거리는 머리핀을 하고 와서 눈을 아프게 만들어서, 아무튼 사방에서 눈과 귀를 신경쓰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연주에 더 만족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허프만의 독특한 제스처와 무대 매너도 마음에 들었고, 사인회에서의 친근한 모습,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당신이오' 했더니 '정말이냐' 면서 아이처럼 웃던 모습이, 안 그래도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인 스티븐 허프의 인상을 더 좋게 만들어서, 그의 이번 연주회는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살아 있는 피아니스트로 망설임 없이 스티븐 허프를 꼽으면서, '이 아저씨가 언제 또 오려나'하고 몇 년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