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텔레만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 - 레이첼 포저 :: 2008. 8. 3. 04:24

사용자 삽입 이미지

 

 

텔레만 바이올린을 위한 12개의 환상곡 1번

 

 

제가 가진 이상한 고정관념 중에 하나가 바로 '바로크 음악은 지루하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절대 지루한 음악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나 몸으로나 늘 직접적으로 겪고 있으면서도, 텔레만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서 이 곡들의 어딘가가 지루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고 있으니, 이걸 고정관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잠재의식의 부표화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간에 정리도 되지 않을 이 문장과 상황을 정리하자면, 제가 지금 꽤나 난감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 확실한 상황 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제게 언제나 재미를 주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도 역시나 저를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인데, 그가 바로, 이제는 한참을 깎아쳐서 '실력 있는 중견 연주자' 정도로 평가하려고 해도 억지가 되어버리는, 레이첼 포저입니다. 바로크와 고전파를 넘나들며 탄탄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는 포저는, 이제는 어느 작곡가의 음반을 내놓아도 기대가 되는, 언제나 듣는 재미가 있는 연주자이니까요.

 

포저가 두 번째로 도전한 이 무반주 곡의 주인은, 바흐와 거의 동시대를 살다 갔으며, 바로크와 고전파 양쪽에 모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입니다. 당대에는 바흐와 헨델을 넘어서는 인기를 누렸고, 존재하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수의 곡들을 남겼던 바로크 시대 독일 최대의 작곡가죠. 지금은 바흐와 헨델에 밀려나 있지만, 그의 실내악 곡들은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바로크 실내악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텔레만의 음악이 지니는 최대의 가치는 그것이 '국제음악'이었다는 점입니다. 텔레만은 자기 나라인 독일 뿐만 아니라 당대 유럽의 여러 나라들, 프랑스나 이탈리아, 심지어 폴란드의 음악에까지 정통해 있었고, 그 양식들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덕분에 텔레만의 음악은 대단히 복잡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단정한 바탕 위에 아름다운 선율과 생기넘치는 리듬이 마음껏 뛰놀게 되었죠.

 

그래서 텔레만의 음악을 처음 접하면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아주 조용한 단선율로 시작해서 점점 더 복잡하게 분화되고, 그러면서 계속되는 대위법적 모방이 반복되면서도 각기 다른 느낌을 주면서 진행되기 때문이죠. 여기에 화성학적인 고려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텔레만의 음악을 쫓아가다 보면 귀는 긴장을 늦출 틈이 없고, 머리는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많이 가지고 놀던 '얌체공'이 통통거리며 튀어다니는 느낌이랄까요. 뻔히 예상되는 방향으로 음악이 전개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뒷통수를 딱! 하고 때릴 때가 있거든요.

 

이러한 특징은 실내악곡 뿐만 아니라 무반주 곡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 역시 전형적인 텔레만 음악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독주악기 혼자서 모든 역할을 다 해내야 하는 무반주 곡은 일반적으로 연주자에게 부담이 심한 편인데-아무래도 공간과 시간을 단 하나의 악기로 동시에 채워야 하기 때문에, 우선은 악기의 소리와 울림이 받쳐줘야 하고, 또 기교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으니까요-, 텔레만의 '환상곡' 역시 연주자로 하여금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난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곡의 전체적인 구조를 꿰뚫고 있어야 하고, 순간순간의 변화에 귀기울여야 하고, 그 변화와 변화의 사이를 민활하게 타넘어야 하기 때문이죠.

 

이것은 단순히 테크닉이 좋다, 는 문제와는 또다른, 어쩌면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음악의 이해와 소화와 표현에 대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영역의, 음악,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텔레만의 환상곡 연주는 단순히 그의 악기가 좋다거나 음의 질감이 좋다거나 테크닉이 좋다는 정도로 연주를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텔레만의 음악 그 자체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그만큼을 잘 표현하느냐의 문제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에서는 그 생기발랄함이 오히려 약간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포저의 연주성향은, 텔레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연주는 이미 소리의 질감이나 악기의 우수함을 뛰어넘어 있고, 무수한 반복과 변화와 조화의 이랑과 고랑 사이를 자신과 확신에 넘쳐서 넘나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포저의 연주는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의 연주는 텔레만이 의도한 바대로 한쪽에서는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생동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원적이면서도 그 합에서는 견고한 통일성이 느껴지는 이러한 연주는, 자신의 연주에 대한 확신, 곡의 이해와 그 해석에 대한 확신, 작곡가와의 교감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포저는 텔레만의 의중을 관중하는 듯한, 단순하면서도 활발한 연주로, 기대를 여지없이 충족시켜 주고 있는 셈이지요.

 

결론적으로, 포저의 텔레만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위트와 유머와 활기와, 여기에 조금 더 보태서 약간의 멋스러운 진지함 또한 잘 버무려져 있지요. 음악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탐구, 이를 받쳐주는 학구적인 해석능력과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테크닉, 음악 그 자체에서 찾아내는 생동감과 열정과 즐거움. 이런 것이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첼 포저가 지니는 최대의 장점이고, 그 모든 장점들은 이 앨범 안에 응축되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바로크 음악은 지루하다'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제 생각이 고루한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즐겁게 인정하면서, 이제 이렇게 말하렵니다. '바로크 음악은 재미있다! 그리고 포저의 바로크는 더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