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라흐마니노프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 미하일 플레트뇨프 :: 2008. 8. 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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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인접권 관계로 음원을 삭제했습니다)


구름이 흐르는 소리라도 들릴 듯 적막한 호수가 있습니다. 삭풍조차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산기슭에서, 얼다 지친 나뭇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외로움에 몸서리치다 저 홀로 얼어붙은 호수로 떨어집니다. 첫 번째 물방울은 떨어지자마자 호수의 외로움에 잠겨 함께 얼어붙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렇게 계속, 물방울들이 침잠해 있는 호수의 숨결을 두드립니다. 저마다 다른 울림으로요. 언제나 비어있을 뿐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는 않는 그, 쓸쓸함, 에 대한 두드림.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런 '느낌'으로 시작합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어느 호숫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여름 휴가 동안이었고, 호수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곡을 만들었는지, 아니면 흐르는 구름을 보고 만들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자작나무에 부는 바람을 보고 작곡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라흐마니노프가 곡을 만드는 내내 가졌던 정서를 우리와 한껏 나누고 싶어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쓸쓸한 곡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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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가득찬 얼굴만으로도 어느 집안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들처럼, 라흐마니노프의 얼굴에서는 어느 사진에서든 쓸쓸함이 뚝뚝 묻어납니다. 외모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아마도, 서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쓸쓸함'에 대해 가장 많은 이해와 가장 많은 정서를 지니고 살았던 작곡가일 겁니다. 그의 작품들은, 어느 곡에서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쓸쓸함이 진하게 묻어나오고,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치 한겨울의 자작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거든요.

기실 라흐마니노프는 시대의 흐름과는 반대의 흐름을 보이는, 벌판에 홀로 서서 거센 바람에 맞서고 있는 자작나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시기는 소위 현대음악의 태동기와 맞물리는데, 라흐마니노프는 스크리아빈과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음악의 기법들, 곧 무조성기법과 12음 기법 등의 완전히 새로운 양식들을 상당히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나는 미리 계산된 공식과 이론에 의해 작품을 만드는 작곡가들에게 동의할 수 없다. 감히 말하건대 위대한 음악은 결단코 그런 식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 고 말한 것처럼,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의 창작 과정에 있어, 무엇보다도 깊은 내면의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영감과 서정성을 중시했습니다. 논리적이고 기계적인 현대음악의 질서정연함 앞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오히려 옛날로 회귀하는 낭만주의였고, 그 정서와 영감이 바로 쓸쓸함이었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그 비어있는 듯한 차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라흐마니노프의 쓸쓸함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수에 찬 그의 눈동자가 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인생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짙은 그림자인 것처럼요.

그래서일까요,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음표의 빈자리, 다시 말해 음과 음 사이의 여백이 유난히 크게 느껴집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고요한 테마에서 시작해서 약간씩의 변화를 주며 곡을 만들었는데, 이는 테마의 변화 뿐만 아니라 곡의 길이 변화에도 해당됩니다. 전체의 1/3 정도는 박자와 길이가 거의 일정하고, 그 다음 1/3은 박자와 마디수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며, 마지막 1/3은 그 변화가 더 복잡하게 이루어지거든요. 여기에 더해 주제 선율을 갈수록 잘게 잘라내고, 거의 일정한 움직임(5도)을 보이는 화성 구조에 비화성적인 음들을 덧붙여놓았기 때문에, 음 간의 여백은 마치 쉼표에 액센트가 붙은 듯, 크게 느껴집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이 곡에서는 테마 뿐만이 아니라 음표가 없는 부분에서까지도, 원곡-이 곡의 주제선율은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12번 '라 폴리아(La Folia)'에서 따온 것입니다-에서는 미처 느낄 수 없는 쓸쓸함이 짙게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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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트뇨프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오마주'라는 제목이 붙은 이 앨범에서, 자신만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사실 얇게 언 얼음을 저미는 듯한 그의 연주 스타일은 많은 팬들과 함께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안티 팬들을 양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 곡에 있어서만큼은 플레트뇨프의 스타일이 정말 제대로 들어맞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지 한 번 살펴 볼까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코렐리가 작곡한 소나타의 주제선율 역시 오리지널은 아닙니다. '광란'이라는 뜻을 지닌 '라 폴리아'라는 곡은 본래 야단스럽고 경쾌한 포르투갈의 민속 춤곡이거든요. 이것이 단순화되면서 바로크 시기부터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그 선율과 리듬이 굉장히 많이 차용되며 유명해졌고-심지어 '폴리아'가 서양음악의 척추뼈라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코렐리의 곡에서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바로 이 '폴리아'의 선율을 주제로 변주곡을 만든 것인데, 사실 코렐리가 폴리아를 작곡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뒷날의 라흐마니노프는 곡의 제목에서 '코렐리'를 빼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제목을 바꾸고 싶어했던 것만큼이나, 코렐리의 '라 폴리아'와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는 전혀 다른 곡입니다. 코렐리의 소나타의 키 포인트는 슬프고 애절한 느낌, 공간을 밀도 있게 채우는 애잔한, 공간적인 울림과 음 간의 연결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덥고 습한 남국(南國)의 음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지요. 반대로, 라흐마니노프의 키 포인트 역시 슬픈 느낌이긴 합니다만, 애절하다거나, 애잔하다거나, 음이 공간을 채운다거나, 하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얼어붙은 호수에서 얼음이 갈라질 때 나는 소리이고, 저 멀리 높은 산악에서 눈이 흘러내리는 소리이며, 벌판에서 가랑잎이 구르는 소리이고, 홀로 선 나뭇가지가 저 홀로 부러지는 소리, 바로 스산하고 적막하고 추운, 북국(北國)의 음악,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것은 차 있는 공간보다도 비어있는 공간을 더 많이 보여주는, 그런 느낌, 바로 그 쓸쓸함이 한껏 담겨 있는 곡인 것이지요.

플레트뇨프의 연주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그대로 얼음이 깨지는 소리이고 나뭇가지가 툭 부러지는 소리이며, 그가 만들어내는 울림은 비어있음을 더 강조해주니까요. 음과 음의 연결보다 그 사이의 아주 짧은 여백의 표현이 더 중요한 곡에서, 울림이 자제된 정확하고 간결한 그의 터치는 그 여백의 미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플레트뇨프의 손끝에서, 남국의 춤곡 라 폴리아는 비로소 러시아의 쓸쓸함이 담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기대합니다. 언젠가, 이 가슴 뭉클한 쓸쓸함을 더없이 잘 표현해 낸, 명민한 피아니스트를 향한, 누군가의 헌사가 담긴 그런 앨범이 또 나올 거라고, 또 다시 누군가가 가끔씩은 어둠처럼 스미는 쓸쓸함을 보여줄 거라고.